금등지사의 비밀
이에 정조는 전. 현직(前現職) 대신들과 문. 무 음관(文.武.蔭官)으로서 2품이상인 경재(卿宰)와 내각(內閣), 삼사의 제신들을 불러모은 자리에서 자신과 체제공만이 알고 있는 이른바 '금등지사'의 비밀을 밝혔다. 이 자리에서 정조는,
전 영상 (채제공)의 상소 가운데 한 구절의 말은 곧 아무해(某年- 임오년 사도세자의 사망년. 즉 그 일)의 큰 의리에 관한 핵심인데, (...) 전 영상이 남이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을 감히 말한 것은 대체로 곡절이 있어서였다. 전 영상이 도승지로 있을 때 선조(先朝. 영조)께서 휘녕전에 나와 사관(史官)을 물리친 다음 도승지(채제공)만을 앞으로 나오도록 하여 어서(御書) 한 통을 주면서 신위(神位)의 아래에 있는 요 자리 속에 간수하도록 하였었다. 전 영상의 상소 가운데 즉(卽)자 아래의 한 구절은 바로 금등(金藤)가운데의 말인 것이다 (...) 금등 속의 말의 하나는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요, 다른 하나는 지극한 효성에서 나온 것이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덕인가. 단지 감히 말하지 못할 일이라는 이유 때문에 차마 제기하지 못하고 장차 묻혀진 채 드러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을 지금 전 영상이 상소하여 그 단서가 발로되었고 그대로 잠자코 있을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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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말한 뒤 "금등문서" 가운데 두 구절을 베껴낸 쪽지(( 注- 금등은 쇠줄로 단단히 봉해 비밀문서를 넣어두는 상자로, 주공(周公)이 관숙, 채숙의 모함을 받아 쫓겨났을 때 무왕(武王)이 금등 안의 책자를 보고 주공의 진심을 알아 망명지에서 돌아오게 하였다. 정조가 공개한 금등문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피묻은 상복이여
피묻은 상복이여
삭장 지팡이여
삭장 지팡이여
그 누구의 것이던가
(이 일을) 금등에 담아 천년을 간직하면서
내 품에 돌아오기만을 바라고 또 생각하노라"
(血衫血衫)
(桐兮桐兮孰是)
(金藏千秋)
(子悔望祠之臺)’
여기서 피묻은 상복과 삭장 지팡이(제사 지낼 때 상주가 짚는 지팡이)는 정축년(정조 33년) 영조의 정비인 정성왕후 거상 때 사도세자가 쓰던 것으로, 영조가 문숙의의 모함('왕죽기를 기원한다')에 빠져 사도세자 처분을 결심하는 계기로 작용했던 물건들이다. 또한 귀래망사(歸來望思)는 한무제가 강충(江忠)의 모함을 믿고 태자 거를 자결하게 하였는데, 나중에 전천추(田千秋)의 상소로 인해 뉘우쳐, 태자를 위해 사자궁(思子宮)과 귀래망사대(歸來望思臺)를 지어 위로하였다(한서 권 36)는 고사에서 온 말로 여기서는 말 뜻 그대로 번역하였다))
를 여러 대신들에게 보여주었다. 즉 정조 자신은 이 문제를 "감히 말하지도 못하고 또 차마 제기할 수도 없는 "곤란한 처지이지만, 영조에게서 특별한 명을 부여받은 채제공의 입장에서는 임오의리를 제기하는 것이 오히려 "선대왕의 본의"를 따르는 신하의 도리라는 것이다. 요컨대 채제공의 상소는 당론에서 국시를 바꾸려는 음모에서 제기된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충성과 의리의 발로"로서, 국왕 자신이 제기할 수는 없었지만 , 누군가 반드시 제기해썽야 하는 정당한 의리라는 것이 정조의 주장이다.
결과적으로 이 문제는 노론의 반발과 정조의 신중한 태도로 인해 채제공의 주장처럼 "큰 괴수들을 처단"하고 "벼슬 자리에서 몰아내는" 수준의 정국 변동을 초래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사도세자의 무함 입은 것"은 공식적으로 해명되었고, 사도세자를 추존할 수 있게 되었다. 생부의 명예가 회복됨으로써 국왕 정조의 정당성이 제고된 것과, 사도세자의 능이 있는 수원이 화성 축조를 본격화할 수 있었던 것은 이것의 또 다른 정치적 효과라 할 수 있겠다.
p.56-59
- <정치가 정조> 박현모 지음. 푸른 역사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