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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8.14. 창경궁 밤나들이-2

소금눈물 2015. 8. 28. 15:22

 

 

 

밤 깊은 창경궁의 가장 반가운 전각.

경춘전입니다.

 

두근두근...

함인정에서 경춘전으로 가기 전에 먼저 환경전부터 만나볼까요?

 

 

 

 

여기에도 '전'이 붙어있지요?

이름만 보아도 임금과 왕비, 대비가 머물렀던 침전이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경춘전이 왕비와 대비가 머물렀던 곳이라면 이 환경전은 왕과 세자가 기거했던 곳이랍니다.

창경궁 창건 당시에 세워진 건물이지만,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 순조연간 대화재 등으로 소실과 재건을 반복하는 기구한 운명을 겪었지요. 지금의 건물은 순조34년에 재건한 곳입니다.

 

이 환경전은 조선의녀들 중에서 유일하게 임금의 주치의를 맡았던 대장금이 중종을 치료한 곳이기도 합니다.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출산을 맡았고,1522년 자순대비의 병을 치료한 후 이 공으로 중종의 치료를 전담하게 됩니다.

중종은 오랫동안 앓아오던 중풍과 그 합병증으로 1544년 환경전에서 승하합니다.

 

임금과 세자, 왕과 대비가 머물던 곳이니 경춘전이나 환경전 옆으로 부속건물이 얼마나 화려하게 가득차 있었을까만, 일제 강점기에 모두 사라지고 지금은 본전만 남아 있습니다.

환경전은 중종과 소현세자, 효명세자가 돌아가신 곳이기도 합니다. 환경전 뒤로 여러 대비들이 기거하시던 전각들이 늘어서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소실되어 빈터만 남아 있습니다.

 

 

 

 

짜잔~!

오오오 경춘전!

자타공인 완전 정조빠 소금눈물! 오매불망 그리던 경춘전에 드디어 이르렀습니다.

 

경춘전을 처음 지은 이는 성종임금이었습니다. 모후인 인수대비를 위해 지었습니다.

이후에 왕비의 산실청으로 쓰여 우리 정조대왕께서 태어나시고 사도세자와 혜빈이 살았으며 대비가 된 혜경궁이 돌아가신 곳입니다.

창경궁의 안방이랄 수 있겠네요.

 

창경궁에는 유독 정조와 사도세자, 혜경궁의 체취가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들이 태어나고 사랑하고 죽음으로 이별한 곳.

경춘전에 이르러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평생 출생의 컴플렉스에서 시달리던 영조에게, 정조의 탄생은 실로 다시 없는 기꺼움이었습니다.

적장자로 보위에 오른 임금은 조선왕조 오백년 역사에서 단 여섯 분에 불과합니다.

정궁인 혜경궁에서 첫아들이 태어나 세손으로 책봉이 되자, 영조는 이백 년만에 정궁이 적장자를 내었다고 기뻐했다고 하지요.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적장자로 보위에 오르지는 못하고 영조의 요절한 맡아들 효장세자의 후사로 왕통을 잇게 됩니다.

용상에 오른 정조의 첫 일성이, 아아 짐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하고 외쳤을때 그가 견디며 살아온 세월이 슬픔과 분노, 한이 절절하게 느껴집니다.

 

부모님의 사랑과 추억, 자신의 탄생이 깃든 이 전각을 정조는 몹시 사랑하여 이 전각안에 친히 <탄생전>이라는 현판을 써서 걸었지만 오늘은 공개되지 않아 볼 수 없습니다.

경춘전의 현판은 정조의 아드님이신 순조의 글씨입니다.

 

 

 

 

 

조선 역사의 가장 축복이고 아쉬움이었던 우리 정조.

재위 1776∼1800. 이름은 산(祘).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 영조의 둘째아들인 장헌세자(莊獻世子, 일명 思悼世子)와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비(妃)는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왕후(孝懿王后)입니다.

1800년 6월에 49세의 나이로 승하하여 그의 유언대로 융릉 동쪽 언덕에 묻혔다가 그의 비 효의왕후가 죽으면서(1821) 융릉 서쪽 언덕에 합장되어 오늘날의 건릉(健陵)이 되었습니다. 시호는 문성무열성인장효왕(文成武烈聖仁莊孝王). 대한제국이 성립되자 1900년에 황제로 추존되어 선황제(宣皇帝)가 되었습니다.

 

문과 무에 두루 뛰어나 조선의 과학기술과, 학문, 문화의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모든 방면에 가히 천재라 아니할 수 없어 그 쟁쟁한 영정조의 뛰어난 신하들을 가르칩니다.

만천명월주옹. 만 천하를 비치는 명월이 나로다. 자뻑이긴 하지만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는 왕이었지요.

 

정조치세에서 활동했던 그의 신하들, 학자들, 화가와 시인들, 문사들을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지요.

그는 정조였습니다.

그 이름만으로 설명은 더 필요하지 않습니다.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싶어, 돌아보고 다시 확인하며 돌아봅니다.

승하하신 영춘헌도 돌아보고 싶은데 밤이 깊은데다, 창경궁의 조명이 거의 없어서.. ㅜㅜ

게다가 공개된 전각도 아주 한정적이어서 영춘헌, 집복헌은 가지 못했습니다.

 

낮이었으면... 밤이라도 달빛이 좋았으면.. 아쉽습니다.

 

 

 

 

창경궁 가장 안쪽, 왕비와 왕의 침전이었던 통명전입니다.

밤, 조명도 없고, 사진기는 손전화고, 사진사는 빙구고. -_-;

 

사화를 일으켰던 여인 장희빈. 왕세자를 낳고 사사된 비운의 여인.

실록에 '아름다운 여인이었다'를 기록하게 한 여인.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역사가 있는 곳입니다. 이 통명전 뜰에 인현왕후를 저주한 물건을 묻었다가 발각이 되어 사사되지요.

지붕 위 용마루가 없는 것이 왕비의 침전이었던 것을 바로 알게 합니다.

 

주인 잃은 불빛만 비취지만 이 통명전에 딸린 왕비가 머물렀던 곳이니 부속전각만도 몇이었을지요.

꽃담으로 둘러쳐진 통명전 뜨락에서, 스란치마를 입고 후궁나인을 둘러세우고도, 첩첩담장을 사이에 두고 지척의 남편을 부르지도 못했을테니

권력이 지엄하다 해도 그 처지가 좋기만 하였을까요.

 

사랑을 받을 때는 나라를 흔들어가며 정을 주더니, 사랑이 떠나고 나니 빨리 죽지않는다고 사약을 거듭 내리네요.

부귀영화도, 그 사랑도 참 덧없습니다.

 

자료를 보면, 퇴락한 전각이지만 내부의 치장이나 단청에는 화려한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볼 수 없고, 통명전의 어둠이 역사의 슬픔을  보여주는 것만 같습니다.

 

 

 

화강암으로 가를 두른 지당.

기껏 이 조그만 연못 하나 주고 꽃담 안의 하늘이 주어진 전부의 자유였나 싶네요.

 

 

 

 

한 여자의 얼굴로가 아니라, 가문과 문파의 가장 날카로운 창과 방패로 나서야 했던 왕비들.

권력의 부침에 따라 흔들리는 왕족들은 그렇다 치고, 모시는 주인의 처지에 따라

실록과 야사에 이름 한자 남기지 못하고 떠난 그 수 많은 여인들의 한숨은 어찌 다 말하겠습니까.

 

 

 

 

 

궐내 각사를 빠져나와 춘당지에 이르렀습니다.

이름 그대로 봄 풍경이 그렇게 좋다는데 밤이라 보이지 않습니다.

조명이 비취는 춘당지 앞에 사람들이 모여서 밤 정경을 즐기고 있네요.

 

원래 춘당지는 임금이 백성의 농사를 체험하던 논이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농자천하지대본, 백성의 삶의 근간을 농업에 두고 천기를 살피던 나라였으니 임금은 절기를 정해 이렇게라도 백성의 삶을 체험하였고 왕비도 누에를 치고 길쌈을 하며 모범을 보였답니다.

 

 

 

창경궁 나들이의 마지막.

대온실입니다.

 

1909년에 건립하였으니  백 년이 넘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온실입니다.

최초의 서양식 온실로 철골 구조와 유리, 목재가 혼합된 건축물입니다. 이 온실로 슬픈 역사의 흔적입니다. 일제가 순종을 창덕궁에 유폐하고 순종황제를 위로한답시고 창경궁을 동물원으로 지으면서 함께 지은 것이지요. 지어질 당시에는 동양 최대의 규모였답니다. 왕실의 찬란한 역사가 깃든 전각이 쓸려나가는 것을 속절없이 지켜보았던 마지막 황제가 웅장한 유리온실을 바라보며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선황제인 아버지는 독살당하고, 어머니는 참혹하게 살해당하고, 형제자매들마저 이리저리 뿔뿔히 흩어지고.

 

 

 

 

무심하게 오가는 후손들의 눈에는 대단할 것도, 화려할 것도 없는 그저 좀 오래된 온실일 뿐이겠지만요.

 

 

이렇게.. 발로 다니고 마음으로 보고 사진으로는 전혀 전혀!!! 그 마음을 남기지 못한 여행기를 마칩니다.

 

 

 

어디가서 창경궁 밤나들이 갔다왔다는 소리를 하지를 말아야 지 이거 원 참.  -_-;

 

밝은 날에 꼭 다시 가서 우리 임금님의 흔적을 따라가보고 싶습니다.

으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