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정림사지 5층석탑
탑은 탑파(塔婆)를 줄인 말로 스투파라는 범어를 한자로 음역한 것입니다.
인도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탑은 반구형의 분묘형태였는데 차차 후대에 이르러 그 밑에 높은 기단을 만들고 탑신을 받치고 탑신 위에 상륜의 수효를 늘리고 주위에 돌 난간을 둘러 아름다운 조각을 새겼습니다.
처음 우리나라에 도입될 당시에는 목탑양식으로 전해져 삼국시대에는 목탑이 유행하였지만 차츰 독특한 한국식 석탑이 자리잡게 되지요. 대체로는 기단, 탑신, 상륜의 형태로 조성됩니다.
동아시아에 전해진 탑은 처음에는 목탑의 헝태로 전해졌을 것이나 시기를 지나면서 각 나라의 자연과 재료에 따라 유행하는 탑의 형식이 다릅니다. 일반적으로 중국은 전탑(塼塔. 벽돌로 쌓은 탑), 한국은 질 좋고 풍부했던 화강암으로 인해 석탑이 발달하고 일본은 목탑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우리나라 잦은 전화를 겪으면서 목조건축물이 소실되고 현존하는 탑도 역시 석탑이 많이 남아있게 되기도 했겠지요.
일반적으로 탑을 보면 2.4.6 식의 짝수 층이 아니라 3.5.7 식의 기수 탑이 많지요?
탑을 이렇게 기수로 조성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탑의 층수는 불교 교리나 사상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를 비롯한 고대 동양의 우주관이나 음양오행설에서 온 것입니다. 천지 자연의 원리와 법칙에 하늘과 사람의 상호감응하는 원리가 음양오행설이지요. 음양오행설은 역술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과 악기, 우리가 접하는 색, 옷 그 모든 것에 두루 적용하였습니다. 거문고의 줄 수와 쟁(
존귀하고 길하며 상서로운 양의 수인 1.3.5.7.9를 탑에 적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우리가 흔히 보는 석탑이 삼층이나 오층, 칠층이 많은 이유입니다. 간혹 경천사지 십층석탑이나 원각사지 십층석탑처럼 음의 수인 10으로 세워진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3+7의 개념에서 10층인 것입니다.
각설하고-
날라리 예수쟁이인 저지만 절구경 다니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궐이나 옛 관청, 고택등도 있지만 아무래도 우리 고건축 문화 유산을 가람건축에서 가장 쉽게, 깊이 만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 제가 본 우리나라 탑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탑은 바로 정림사지 오층석탑입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조성연대는 백제 말기인 7세기 전반으로 추정됩니다.
좁고 낮은 단층 기단과 민흘림의 각 층의 우주가 있고 각 층 옥개석은 얇고 넓은 형태입니다. 옥개석 전각에 나타난 반전 등을 보노라면 장엄하고 단정한 우리 목조건축의 향기가 느껴집니다. 석탑에서 목조건축이 느껴지다니 이상한 일이지요?
그렇지만 세부수법은 맹목적인 목조건축의 양식에서 탈피하여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미와 단정하고 격조 높은 기품을 가진 탑입니다.
화려하고 아기자기한 모양새야 통일신라시대의 탑들이 있지만 이렇게 절제된 아름다움은 (제 식견이 짧아서일 수도 있겠지만) 이 탑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한 발 물러서 맨 꼭대기 상륜부부터 탑신, 기단까지 흘러내리는 선을 연결해 보세요. 어디하나 군더더기 없이 똑 떨어져 흐르는 대칭의 아름다움입니다.
흘러내리는 선을 연결해서 보면 마치 빛이 탑 위의 하늘에서부터 땅에까지 흘러내리는 듯한 착각이 듭니다.
수학과 물리학을 모르는 이의 눈에 보아도 균형의 아름다움이 시각적인 착시마저 불러옵니다.
결코 낮지 않은 탑이면서도 무겁거나 답답하지 않고 무엇 하나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이 완벽한 정형미입니다.
탑신의 옥개석을 판형으로 그대로 올렸으면 아무리 수학적으로 완벽한 조형을 갖췄다 하더라도 물러서서 보면 이 탑은 굉장히 밋밋하고 답답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판석의 끝을 살짝 접어올린 것 좀 보세요.
새의 날개처럼 나붓이 들어올린 저 선으로 인해 답답한 돌덩이가 세련되고 우아한 몸짓이 됩니다. 우리 건축의 지붕선이나, 확장해서는 이 산하의 가람과 강들에서 보듯 은근한 품위가 느껴집니다.
사실 모든 아름다움의 기준은 고장마다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은 아닙니다.
모든 문화유산은 그 터전의 자연에서 비롯됩니다. 중국의 압도적이고 화려한 고건축의 선들은 풍부하고 다양한 지형의 변화에서 왔습니다.
일본의 탑이나 고건축을 보면 지붕이 건축 전반에서 차지하는 면이 우리 것보다 훨씬 크고 직선으로 바로 지상으로 내려꽂히는 형태입니다. 잦은 눈 비와 화산폭발로 인한 재의 산적을 생각하면 지붕의 형태를 그런 식으로 만드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었겠지요. 건축과 더불어 거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아름다움의 기준과 형식도 그렇게 자연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면 몸으로 전화(戰禍)를 견디느라 탑신에 남은 그을음이 그날의 고통과 슬픔을 웅변합니다. 그 아름다운 사비성이 불타고 꽃같이 아름다운 사람들이 쓰러지고, 도성의 맨 한가운데 장중하게 서 있던 이 가람이 무너지는 것을 이 탑은 불길 속에서 바라보고 있었겠지요.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어렸을 때 백제문화제 백일장은 이곳 정림사지 잔디밭에서 열리곤 했습니다.
금가루처럼 부서지는 가을 햇살 아래 잔디밭에서 글짓기를 하던 생각이 납니다.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기품이 있고 장중하고 우아하여 속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정결한 남성미.
과연 탑중의 탑이라 할만 하지 않나요?
이 탑 하나를 보는 것 만으로도 백제의 아름다움, 그 장중하고 당찬 예술성을 알 수 있습니다.
탑으로 하면 정림사지 오층석탑, 자기로 하면 조선백자 달 항아리, 그림으로 하면 이정의 풍죽도.
담담하되 가난하지 않고 당차되 넘치지 않으며 아름답되 속되지 않은 우리 예술의 뿌리를 봅니다.
새로 지어진 박물관도, 모형이 낯선 유물들도 아직은 정이 안 가는 것은 세월의 더께가 없고 온기가 덜 묻어 그런지도 모르겠습다.
연륜이 쌓이고 유물도 늘어나면 마음이 좀 편안해지려나요.
오늘 아침 뉴스를 보니 백제 멸망 후 왜로 건너간 유민들이 건설했던 작은백제 성 이야기가 나오네요.
백제. 사라진 백제의 영광.
아름답고 슬픈 역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