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 완결
네가 등을 보이기 전에 나는 너를 버릴 거야. 멀리 달아나서 어느 날, 어느 골목에서도 너는 내 그림자를 찾지 못할 거야. 네가 준 햇살, 마디가 부러진 노래들. 한숨을 쉴 때마다 벌어져 떨리던 네 입술도 나는 기억하지 않을 거야. 내 손을 뿌리치며 철만은 화를 냈다. 그런 말을 하고 나서 그날 저녁, 해가 저물기도 전에 면사무소 국기 게양대에 제 그림자를 매달고 서 있었다. 그림자는 낡은 국기처럼 펄럭였다.
나는 이 촌구석이 너무나 싫어서, 아무에게나, 아무렇게나 망가지고 부서져 죽어버리는 것이 나을 것이라 생각했다. 내 나이보다 더 늙은 먼지더미에 결박당한 채 시들어버릴 것 같았다. 마른 잔디밭에 서리꽃이 피는 아침이면, 멀리서 보이는 면사무소 붉은 지붕으로 누군가 폭탄을 던지는 상상을 했다. 슈웅, 펑. 폭발. 끝. 그러면 좋을 텐데. 나는 왜 떠날 생각을 하지 못하고 누군가 부수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그때였지. 네가 끌고 다니던 그 털털거리는 오토바이가 보였다. 저녁이 내려오는 풀숲에서 고장이 난 오토바이를 길가 풀숲에 세워두고 너는 혼곤한 잠에 빠져있었다. 웅크린 등 뒤로 놀이 지고 있었다. 수릿재 뒷산 그늘로 내려오던 붉은 하늘이, 자운영 풀잎 더미에 빠뜨린 철만의 종아리로 느리게 번졌다. 풀숲에 누워 잠든 그 애 옆에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나는 그 애보다 그 애의 오토바이에 매혹되었다.
면사무소 앞을 지날 때마다 부앙부앙 온 동네를 깨우면서 달아나던 오토바이는 어느 날부터인가 움직이지 않았다. 고지서를 받으러 왔던 보급소장이 지서기에게 새 오토바이를 장만해야 한다고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수명이 다 한 오토바이는 신문보급소 앞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었다. 뜨물 같은 달이 뜬 밤, 긴 여행을 끝내고 잠이 든 오토바이를 보았다. 더 이상 푹신하지 않은 안장을 쓸어보았다. 오토바이를 훔쳐 타고 도망쳐볼까. 얘. 너는 어디까지 가 줄 수 있겠니? 나는 금이 간 핸들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어둑새벽에 잠이 깨면 습관처럼 생각했다. 도망칠 거야. 나는 날마다 고물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가서 내 몸을 부수는 상상을 했다. 다리 난간에 부딪고, 아스팔트에 처박히고, 어른의 두 아름을 넘는 오래된 정자나무로 날아가서 내 머리통과 다리와 매끈한 허벅지가 산산조각으로 터지는 상상을 하면 통쾌했다.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만큼 즐거웠다. 엄마가 나를 두고 죽어버린 이후 처음으로 나는 잠을 잤다. 깊어지는 잠 속으로 오토바이가 달려와서 부딪쳤다. 쾅.
철만은 명치가 자주 아프다고 했다. 살품 어디에 멍이 든 것처럼 누르지 않아도 욱신거린다고 하였다. 너무나 외로워서 자기 발자국을 보기 위해 뒤로 걸어갔다는 사람처럼 철만의 발걸음은 비틀거렸다. 내가 그의 오토바이에 열렬히 매혹된 것처럼, 내 뒤틀린 욕망에 철만은 사로잡혔다. 우리의 욕망은 권태와 상처로 뒤섞여 하나가 되어버렸다. 그것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착각했다.
건너편 간판이 다시 깜박인다. ‘행복전사’의 전등은 수명이 글자대로 다 제각각인 듯, 어떤 것은 조금 더 선명하고 어떤 것은 불안하게 주위를 살피며 힐끔대고 있다. ‘행복’쪽보다는 ‘전사’쪽이 더 환하다.
식은 커피를 철만은 조금씩 아껴 마시고 있다. 밑바닥에 엉겨 붙은 시럽을 녹이기 위해 잔을 빙글 돌렸다. 그새 눈낱이 더 잦아졌다. 협주곡은 2악장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행복전파사 옆 골목으로 허리가 굽은 노파가 들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노파가 딛는 바닥마다 바스락거리는 낙엽소리가 날 것 같다. 나는 손바닥을 펴서 창문에 대 보았다. 손바닥에 물기가 가득 번졌다. 둘째 손가락과 셋째 손가락 기둥 사이로 노파가 사라져버렸다. 손가락 마디에 숨은 노파를 찾으려고 나는 내 손을 들여다본다.
다 마시고도 철만은 커피 잔을 내려놓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골똘히 바닥을 쳐다보고 있다. 철만의 아랫입술에 커피자국이 남았다.
“인간이 살아내는 시간은 결코 긴 것이 아니야. 나미브 사막의 사막만년청이라는 풀은 첫 꽃을 피우기까지만 25년이 걸린대.”
철만이 중얼거렸다. 책에서 읽었어. 단 두 장의 잎뿐인 이 풀은 천 년에 이르는 생애동안 해안에서 불어오는 수증기를 흡수하기 위해 제 잎을 갈기갈기 찢으며 연명한대.
사막만년청이 갈기를 찢으며 모래바람이 부는 쪽으로 눈을 찡그리고 서 있는 모습을 생각했다. 죽어버릴 수가 없어서 견디고 있는 건지도 몰라. 모래언덕들이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돌아눕는 밤이면 제 몸을 찢어 사막을 건너는 생각을 할 거야. 나는 빨대로 이미 다 식어버린 커피를 홀짝 빨아마셨다. 유리 탁자 아래서 덜렁거리는 내 발끝을 따라 탁탁 소리가 났다.
“아 시시해.”
철만은 한숨을 쉰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한없이 너그럽고 비굴한 철만에게 나는 야비하다. 집요하고 간교하고 잔인하다. 사랑을 아직 끝내지 못한 사람은 상대에게 언제나 비굴하고 초라하다.
까페 문이 열리면서 문에 달아놓은 쇠종이 울렸다. 바람이 사람보다 먼저 달려들어온다. 머리에 얹힌 눈을 털면서 남자가 들어온다. 혼자서 책을 읽던 여자가 남자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여자는 남자가 오는 쪽으로 먼저 나가 길을 만들었다. 눈이 쌓인 그 길을 따라 남자가 왔다. 남자가 여자 쪽으로 다가가는 사이 여자는 읽고 있던 책을 접어 가방에 넣고 일어섰다. 다시 쇠종이 울린다. 남자가 데려온 바람은 밖으로 나가지 않고 빈 의자를 찾아간다.
더는 손님이 들어오지 않았다. 창 밖에 보이는 보도블럭은 그새 하얗게 눈으로 덮여 있었다. 눈길을 걸어가던 여학생들 몇이 장난을 치다 미끄러질 듯 휘청하였다. 웃음소리가 눈송이와 함께 굴렀다.
아이들이 지나가고 나서 거리는 조용해졌다. 길은 흰 눈의 사막이 되었다. 깜박깜박. 행복전사와 눈맞춤을 하던 전신주가 길게 하품을 했다.
철만은 그새 잠이 들었다. 철만이 입은 점퍼의 모자 털이 눌려 있다가 숨결을 따라 일어섰다 앉았다 했다. 창문 밖으로 난 까페 간판의 불빛이 철만의 얼굴로 떨어진다. 철만의 잠에는 달이 떴다.
달이 뜬 사막을 낙타가 걷는다. 혼자 걷는다. 타박타박. 자신이 묻힌 모래 언덕에 이르렀다. 고개를 떨어뜨리고 바라본다. 자신의 머리가 묻힌 구덩이는 흔적도 없다. 바람은 오래 전에 발자국을 모두 지워버렸다. 달과 낙타 뿐이다. 사막을 건너가는 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잎이 갈기갈기 찢겨 마른 풀이 되어버린 사막만년청 밑으로 한쪽 발이 끊어진 전갈이 지나간다. 모래더미로 코를 묻고 낙타는 눈을 감는다. 달이 가만히 철만을 바라보고 있다. 사막은 고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