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돌말사람들

외동리 유씨 -5

소금눈물 2014. 1. 17. 14:41

 

이대로 그냥 집으로 갈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 진료실 문이 열리더니 간호사가 이름을 불렀다.


 “좀 어떠세요?”

 

  넉넉하게 웃는 김원장에게 유씨는 입가를 애써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갠찮어유. 고름두 안 나오구 그냥 오늘 실밥 뽑아두 될 것 같은디유?”


 “그래도 워낙 상처가 깊어서 바로 뽑으면 벌어지고 덧나기 쉬워요. 한 사흘만 뒀다 뽑읍시다.”

 

 첫날과 달리 말끝마다 꼭꼭 사투리를 지운 말투에 유씨의 표정이 조금씩 어두워졌다.


 잠시 말을 끊고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김 의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꼭 오시라고 한 것은.... 뭐 사실 손가락 상처는 아시는 대로 소독 잘 허고 며칠 두었다 실밥 빼면 그만이구요. 어저께 한 피검사 결과가 나왔어요.”


 “그런디유?”


 자신도 모르게 말이 떨렸다.


 “큰 병원으로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날 초음파 검사를 하면서 간 모양이 별루 좋지가 않았어요. 오늘 결과가 나왔는데...”

 

유씨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암...인가유?”


 “예. 일단 피 검사상으로는 그래유. 그래두 뭐 조직검사를 한 건 아니니 지금 확실하게 드릴 말씀은 아니구, 일단 대전 큰 병원으로라두 가 보시는 게 좋겠어요.”


 “그럼 얼마나... 아니, 그럼 어치게...”


 두서없이 말이 꼬였다.


 “우선은 간 수치가 너무 놓고 황달도 심해서 약은 며칠 분 드릴게요. 근데 이게 중요한 건 아니예요. 씨티나 엠알아이도 찍어보고 큰 병원 가면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검사가 많이 있으니께 일단 그 쪽 선생님들한테 의뢰서를 써 드릴게요.”


 시야가 흔들려서 도무지 정신이 없었다. 이 의사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나. 내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데, 호두농원과 집에 일거리가 얼마나 많이 쌓여서 눈이 그치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대전까지 나가서 병원을 찾아가라니. 평생 병원이라곤 모르고 잘만 살아온 자신더러 그런 쓸데없는 돈을 쓰라고 헛소리를 하는 것인가.


 “요즘 자꾸 살이 빠진다거나 기운이 없거나 배가 아프다거나, 혹은 어지럽다거나 속이 자꾸 체하고 그러지는 않으셨어요?”


 황망하게 눈을 이리절리 굴리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유씨가 딱하다는 듯이 김원장이 물었다.


 “일을 원체 많이 허니께 늘 피곤허기야 허구 그렇지유. 촌이서 일하는 사람이 다 그렇지유 머. 살찔 틈이 어딨대유. 호두농사일이 얼마나 바쁜디...”


 “그렇지요...”


 며칠 사이 더 까맣게 탄 얼굴로 일어서는 유씨에게 김원장이 말했다.


 “빠른 시일 내에 꼭 가 보세요. 그리구 가실 때 검사가 복잡할지 모르니까 꼭 보호자분하고 같이 가시구요.”

 

 보호자라니. 일년 내내 눈만 꿈벅이며 쓰러진 통나무처럼 누워 있는 병든 아버지와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외국인인 어린 아내에게 어떻게 말을 하란 소린가. 아버지, 은별엄마 나 간암이래요. 오십 넘어 처음으로 아랫목이 조금 따뜻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다 끝이래요. 죽는대요. 그러란 말인가.

 

 유씨는 김원장이 써 준 진료의뢰서를 점퍼 윗주머니에 구겨 넣고 약 처방전을 받아들고 휘적휘적 병원 문을 나섰다. 유리문을 닫고 나오다 휙 뒤를 돌아보고 부르짖었다.


 “씨발눔! 내가 무슨 죄가 있다구 암이랴!”


 도둑놈들! 우리 농원이 잘 된다구 소문이 나닝게 돈이 좀 있나보다 싶어서 그거 훑어먹을라구 하는 소린 거 다 안다 이 새끼들아! 나헌티 무슨 원수가 져서 암이라는겨? 내가 왜 암이여!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욕이 튀어나왔다.

 그럴 리가 있나. 간암이라니. 평생 술 한 방울도 마셔보지 않고 나쁜 곳에는 한번도 가본 적도 없다. 그저 죽어라 일만 한 자신이 무엇을 잘 못했다고 암이라니! 은별이가 이제 겨우 돌을 넘겼는데. 이제 겨우 호두가 여물어지기 시작했는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허청허청 걷는 유씨의 팔을 누군가가 잡고 흔들었다.


 “아 이 사람! 고란초 다방이서 기다리라닝게 왜 기양 가? 하마터면 하염읎이 기다릴 뻔 했잖여.”


 퍼뜩 놀라 돌아보니 허연 입김을 내뿜으며 씩씩대고 서 있는 보급소장이었다. 도로에 차를 세우고 유씨를 따라 헐레벌떡 뛰어온 모양이었다.

 유씨는 그와 했던 약속이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아. 그랬었지.


 “그 사람 참 승질두 어지간히 급허네. 마침 군청 담당자가 눈 때문에 결근을 해서 일을 못 봐서 그릏지 기양 갈 뻔 했구만? 다방이 들어갔다 안 보여서 혹시나 하고 나와 봤드만.”


 “고연히 저 때문에 더 돌아가실 거 같아서...”


 “아따 어차피 휘발유 똑같이 들어가는디 가는 길이 한나 더 태우구 간다구 달버지나? 하냥 가먼 심심허지 않구 서로 좋지 머. 일 다 봤어 나두. 얼른 타. 어 춥다!”


 서두르는 보급소장을 따라 차에 올랐다.

 부르릉, 낡은 승용차가 어깨를 후르르 떨며 힘겹게 숨을 토했다.

 조금씩 눈이 녹아 검게 맨살이 드러난 아스팔트를 따라 달리며 보급소장이 라디오를 틀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오래된 가수가 노래를 불렀다.


음. 어디로 갈까요. 님 찾느은 하얀 나비이


 흥이 난 보급소장의 노래를 들으면서도 유씨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뜻 없이 스쳐가는 길가 가로수 너머로 눈 속에서 들판을 뒤적이던 까치가 끝내 먹이를 찾지 못했는지 휙 날아갔다.


 “참 그런디 자네 성은 지서기를 어찌 아나? 동창인가? 아닌디? 즉잖이 나이 차이가 날틴디?”


 “우리 성이유?”


 보급소장이 흥을 지우지 못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아까 다방이서 둘이 앉어 있는 걸 봤거든. 중늙은이가 다 되어가는 놈덜 둘이 무슨 여핵교 애덜 만치루 꼭 붙어앉어서 누가 볼꺼라구 새살거리는 걸 보구 참. 신퉁허게 닮은 놈덜이 잘두 동무를 하는 구나 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