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돌말사람들

외동리 유씨 -2

소금눈물 2014. 1. 17. 14:39

“내가 자네 무작시리 고생허는 것이 짠혀서 그릏지 대단헌 거는 알지. 아믄. 유근직이 뚝심을 누가 몰러.”


 “자랑헐라구 하는 일이간디유? 먹구 살라구 헝게 버둥거리는 거지 뭐.”


 침 발린 치사에 뚝하니 내뱉고 유씨는 윗주머니를 뒤져 담뱃갑을 꺼냈다.


 힐끔 쳐다보는 지서기에게 담뱃갑을 내미니 지서기는 화들짝 놀라 손사레를 쳤다.


 “아녀. 연말이 근강금진표를 보구  마누라가 하두 지랄을 혀서 내가 그 소리 듣기 싫어서 올이는 작정허구 금연을 목표루다가 삼고 있어. 이번 참에 또 피먼 아주 호적을 바꾸든지 허야 헐 판이여, 참 나. 근디 아직 인이 남었는지 바드시 닷새 지났는디 아주 환장을 허겄어.”


 쩝쩝 장황하게 사설을 늘어놓고 있지만 유씨는 속으로 픽 웃었다. 유씨가 내민 것이 팔팔이 아니라 던힐이었다면 그때도 저럴지 궁금해서였다.


 유씨가 잡목을 베어 쌓아놓은 나뭇단에 걸터앉아 담배에 불을 붙이는 사이, 지서기는 비탈밭을 오가며 호두나무 중동마다 야무지게 싼 짚이며 밭 사이로 지나는 수로까지 한참을 꼼꼼하게 들여다보았다. 남들 쉽게 하는 말로 호두농사는 놀고먹는 농사라고 해도 이 비탈밭이 이렇게 야무진 옥답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유씨의 호두나무 밭이 잡목림과 확연히 구분이 되는 것은 산밭 들머리부터였다. 자갈을 얼마나 주워 나르고 굴렸는지 제법 그럴싸하게 낮은 담장을 이루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유씨와 모진 씨름을 하다 나가떨어진 수릿재 돌산이 내어준 흰 뼈들의 흔적 같았다. 그 앞에 떡 하니 “희망농원”이라고 팻말까지 붙고 나니 이제는 아무도 유씨가 주제도 모르고 엄한 땅에 아까운 돈을 부었다고 혀를 차는 이는 없었다.


 껍질을 까지도 않은 유씨네 청피호두를 사러 상인들이 수릿재를 들락거리게 되고 그들을 통해 호두나무 한 주마다 삼사십이 넘는 돈이 나온다는 말을 듣고 그제서야 마을 사람들은 입을 딱 벌렸다. 아무 쓸모없던 저 수릿재에 우뚝우뚝 서 있는 호두나무가 사오백 주나 된다니 그렇다면 도대체 유씨는 얼마나 큰 돈을 번다는 말인가. 이쯤 되니 저 노다지를 몰라보고 덜렁 헐값에 팔아버린 전 임자가 속이 쓰리다 못해 다 파일 것이라고 이번에는 그를 동정하여 또 혀를 찼다. 그를 따라 슬금슬금 묵정밭에 어린 묘목을 묻어두는 집도 여럿 생겨난 것이 또 몇 해 전부터였다.


 불쌍한 절름발이 노총각으로 불리던 유씨가 희망농원 농장주로 어엿하게 신분상승을 하게 되었지만 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유씨는 하나도 변한 것이 없이 늘 근동 누구보다 이른 아침을 맞았고 달그림자를 따라 집으로 갔다. 아이들 교복처럼 사시사철 똑같이 걸치는 나일론 셔츠는 이제 하도 기우고 덧대어 제 물색을 알아보지 못하게 된 지 오래였으나 그 옷을 벗고 잠방이를 걸치면 여름이었고 그 셔츠 위에 아버지가 입다 물려준 개털점퍼를 입으면 유씨의 겨울입성 전부였다. 호두 수확이 늘면서 또 하나의 제 팔처럼 등짝에 붙어있던 지게 대신 수레를 굴리게 되고 비료며 퇴비 거름을 나르는 낡은 중고 트럭이 희망 농장 앞에 떡 하니 자리하게 된 게 달라졌을 뿐이었다.


 처음엔 어이없어 하고 나중에는 조금씩 부러움과 시샘어린 눈길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유씨는 묵묵하였다. 그저 비탈밭에서 쉬지 않고 올라오는 자갈을 고르고 죽은 가지 전정을 하며 평생 산지기나 하고 살아갈 것처럼 여일하였다.


 좀 더 멀리 보겠다고 씩씩대며  밭둑을 오르다 하마터면 지서기는 휘청 자빠질 뻔 하였다. 서리가 맺힌 풀을 밟다 미끄덩한 것이었다. 얼어붙은 흙더미들 사이에서 드문드문 올라온 헤어리베치였다.


 지난여름에 외동리를 가다, 유씨네 호두나무 산밭을 보고 지서기는 깜짝 놀랐다. 뼈만 있는 줄 알았던 산밭에 소복하게 녹음이 우거진 것을 보고 무엇을 심었길래 그러나 하였더니 동행한 배이장 말이 그게 녹비로 쓰려고 유씨가 일부러 뿌렸다는 헤어리베치였다. 뿌리기만 하면 따로 퇴비를 하지 않아도 저 혼자 겨울을 견디고 다른 잡초까지 막아주고 또 여름이 되면 제가 먼저 쓰러져 땅을 기름지게 한다니 참 풀 중에서도 여간 신통한 놈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드문드문 서 있는 호두나무도 제법 단단하게 자리를 잡고 밭둑 사이마다 소복하게 쌓인 풀이 햇솜이불처럼 포근포근하여 이 산밭이 황무지였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믿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옷더미에 잔뜩 파묻혀 잘 보이지도 않는 고개를 애써 빼고 지서기가 요리조리 시찰을 할 동안 유씨는 알뜰하게 한 개비를 다 피우고 꽁초를 손가락으로 문질러 껐다. 그가 늘 돌보는 나무들처럼 마찬가지 나무껍질이 되어버린 시커먼 손끝은 뜨거운 불맛도 모를 지경이었다.


 청하지도 않은 객이 눈에 어른거리는 것도 귀찮고 몸도 영 개운치 않았다. 새벽부터 나와 곡괭이질을 하느라 아닌 게 아니라 허리가 얼음을 문지른 것처럼 시리고 온전치 못한 다리도 끊어질 듯이 아파 그만 일손을 거두고 싶었다. 아프고 시린 평생을 어차피 팔자려니 하고 살았는데 표가 나게 몸에 부치는 것이 이제 꾀가 나는가보다고 유씨는 헛웃음을 웃었다.


 꽁초를 던지고 일어섰다. 곡괭이며 삽에 묻은 흙을 깨끗이 털어 수레에 담고 흙을 퍼낸 마른 웅덩이로 다시 흙이 쏟아지지 않게 비닐로 단단히 여몄다. 오후에는 아내와 함께 부여 읍내에 다녀오기로 했다. 돌쟁이 예방접종도 할 겸 아내가 신고 싶어 하는 털 장화도 볼 겸해서였다. 눈발이 비치기 전에 서둘러 다녀와야 했다.


 농기구를 실은 수레를 끌고 휘청휘청 비탈길을 내려오는데 호두나무 숲 여기저기 힐끔대며 살피던 지서기가 얼른 따라 내려와 흔들리는 수레를 잡아주었다. 돌부리에 걸린 바퀴 때문에 씨름을 하는 것을 돕던 지서기가 문득 목소리를 낮춰 자못 은근한 목소리로 건넸다.


“혼자서 농사짓기 심들틴디. 읍내 사는 성은 하냥 나와 살자구 안 허남? 병든 아부지 평생 동생헌티 업혀놓구 그 맘두 펜치는 안 헐 것인디.”


 “노인네가 그냥 여기서 살다 가신다네유. 평생 모시구 산 늠이 그냥 사는 거지, 성이구 동생이구가 뭔 상관이래유."


 “자네 성은 그려두 어지간히 짭짤허게 산다메? 우체국 앞이 사 층짜리 근물이 유근벡이 꺼라구 알만 헌 사람은 다 알드만 머? 돌말 박봉찬이가 슨거 나간다구 중뿔나게 설치구 다닐 때버텀 봤는디 그 자리가 꽤 목이 괜찮어보이더만? 읍내서두 질루 잘 나가는 길목인디 왜 아니겄어?”

 

 그 중뿔난 박봉찬씨가 당신보다 열 살은 위인 양반이라고 유씨는 속으로 비죽거렸다.


“성이라구 모셔가두 벨루 뾰죽한 것두 읎구 그 집두 장 그류.”


 "웨? 그려두 하나벢이 읎는 동생인디 눈 앞이서 동생 사는 걸 보먼 모른 척 헐 거라구? 혼잣몸일 때야 몰라두 자네두 인전 애까지 딸린 가장이 되었는디 애 엄마두 좀 신간 펜히 사는 게 좋지 않겄어? 생각혀 봐. 물론 자네야 읍내건 수릿재 산꼴짝이건 암시랑토 않겄지만 새푸랗게 젊은댁이 하루 죔드락 봐야 우아래 말두 안 통허는  늙은이들만 사는 이런 촌구석보다는 동무라도 하나 더 있는 읍내가 낫지.“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유씨는 수레 손잡이를 탁 놓고 지서기를 멀끔히 돌아보았다.

 수레가 갑자기 서는 바람에 혼자 쭝얼쭝얼 신이 나서 늘어놓던 지서기가 수레바퀴에 종아리를 호되게 박고 비명을 질렀다.


 “업쎄! 그 사람 참. 기척이나 허구 슬 일이지.”


 오만 인상을 다 찡그리며 금방이라도 욕을 퍼부으려다 잔뜩 치켜올라가  굳어 있는 유씨의 눈매를 보고는 저절로 말끝이 사그라졌다.


 “그렁게, 지서기님 인심 좋게 위 아랫등 다니먼서 사방 집구석 고단한 형편 다 살펴주시는 분인 중언 알지만유. 너믜 마누라 외로운 처지까지 살피실 일은 아닌 거 같네유.”


 평생을 가야 큰 소리 한 번 내본 적이 없는 영 숙맥 반편인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허투루 남아도는 기름 한 점 없게 깡 말라 여윈 얼굴에 쨍하니 솟은 분기를 보고 지서기는 황망히 손을 저었다.


 “아녀 이 사람! 그런 말이 아니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