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희를 오래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나례희 사건은 찬찬치 못했던 서리의 어처구니 없는 실수로 판결이 났습니다.
실수가 아니라 계획된 모사였다면 그 뼈를 발라서라도 기필코 살려두지 않으리라 대노하셨던 주상전하는 그에 대해 더 이상은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숨죽여 떨던 중신들은 한시름을 놓았습니다.
낙심한 세손이 궐밖을 나다니며 대취해서 업혀들어온다는 소문이 떠돌았지요.
별 수 없이 그렇게 제 아비의 길을 가는가 보다고 안심하던 이판, 난데없는 세손의 부름에 의아합니다.
날이면 날마다 천것들과 어울려 대취해서 웃전어른들의 걱정을 잔뜩 사고 있다더니, 의외로 세손은 너무나 담담하고 침착합니다.
오히려 서늘한 냉기마저 감돕니다.
덮자는 전하의 말씀 덕분에 무사히 넘어가긴 했지만 역시 저하 앞에서는 마음이 편할 수가 없는 이판.
제가 대감을 뵙자고 청한 건 대감께 제안할 게 있어서입니다.
눈길을 마주치지 못하고 긴장해있는 이판에게 이윽고 저하는 입을 열었습니다.
말씀 하시지요 저하.
제안을 하기 전에, 요즘 홍국영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홍국영이?
아직도 그 놈이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던가?
주상 전하의 어명으로 나례희 사건의 관련자들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
나례희사건을 조사한다니요.
그것도 어명으로!!
나례희 사건의 관련자라니요.
나례희사건은 주상전하께서 사고로 인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그것이 사고가 아니었음은 대감도, 나도, 주상전하께서도 아시는 일이 아닙니까
도대체 무슨 말인가.
편전에서 이미 당신 입으로 모든 것은 사고였다고, 더 이상 거론치 말라 못박으신 건 전하가 아니셨던가.
앞으로는 그렇게 안심시켜놓고 홍국영을 시켜서 조사를 하고 있다니.
홍국영이라면 천하가 다 아는 세손의 오른팔, 왜 그자를 시켜서.
그리고 지금 그 일을 내게 말해주는 세손의 말은 무슨 뜻인가.
홍집의가 조사하고 있는 사람 중엔 대감도 들어있습니다.
나를!
주상전하의 어명을 받드는 홍국영이 나를!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이판대감은 경악합니다.
나례희사건은 국본인 세손을 전하와 모든 왕실 사람, 그리고 중신들 앞에서 저격하려다
실패한 사건이었습니다.
너무나 엄청난 일이었고 만일 이것이 누군가의 사주로 벌어진 일이라면 그는 살아남는 것은 고사하고 온 집안이 멸문지화, 풍비박산될 일입니다.
편전에서 하신 말씀이 진심이 아니라 그 실체를 밝히려는 전하의 심중이 따로 있다면, 그 혐의의 일만 분의 일이라도 받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흔들리는 이판의 얼굴을 세손은 가만히 바라봅니다.
품은 생각을 겉으로 쉬이 내보이는 사람이 아니어서 역심의 그림자도 찾기 어려운 인물, 그러나 분명히 노론의 가장 깊은 뿌리 중의 하나.
이 자를 잡지 못하면 무사히 보위에 오른다 해도 당신의 치세는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역시 전하의 심중은 세손이었다는 것을 이판은 깨닫습니다.
판단이 냉정하고 성정이 칼날 같은 전하께서 세손암살기도에 대해 그리 호락호락 넘어갈 분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지 못했습니다.
살아남은 것이 기꺼워서, 중궁전 혼자 덮어쓰고 무사히 빠져나온 것만이 다행이어서 전하의 마음까지 짚어볼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떡해야 할까요.
전하의 밀명을 받은 홍국영은 모든 노론 중신들의 뒤를 캐고 있을 것이고, 중전과 이판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음이 발각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입니다.
그렇게 신임하고 아끼던 중전을 중궁전에 유폐시키고, 살아있으되 너는 살아있는 목숨이 아니라 하셨다는데 이조판서 하나 따위야 어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나는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마음만 먹으면 더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을 대감께서도 알고 계시겠지요.
허나 난 대감께 시간과 기회를 드리려고 합니다.
젊디 젊은 세손에게서 이판은 꼭 닮은 다른 얼굴을 봅니다.
한마디 언성도 높이지 않으면서도 궁지에 쥐를 모는 고양이처럼 매섭고 날카로운 눈빛, 얼음장처럼 서늘하고도 추호도 흔들리지 않는 냉정함, 그 얼굴 뒤에 날카로운 칼날이 있습니다.
그 칼날이 언제 자신들의 목을 내리칠지 몰라 두려웠습니다.
그 총명함이 일찍부터 남달라 식견이 두루 뛰어났으며, 노론을 뱀을 보듯 하였으니 그가 왕위에 오르는 날은 모두가 죽은 목숨이라 여겼었습니다.
뒤주에 넣어버린 그 얼굴, 그 아비의 손에 피를 묻혀 책임에서도 벗어났다 안심하였더니 불현듯 그 얼굴이 여기 이렇게 자신의 앞에 앉아서 그날처럼 똑같은 눈빛으로 자신을 쏘아보고 있었습니다.
내가 어좌에 앉기 전에 경들의 파벌을 경들 스스로가 종식시키도록 하십시오.
파벌...
이미 거대한 몸뚱이가 되어 이 나라의 조정 자체가 되어버린 파벌을 없애라고!
이 나라의 노론은 한 정파가 아니요 이미 사직의 얼굴 자체인 것을!
허나 이미 늙어 약해진 전하의 뒤를 이어 세손이 보위를 이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아비의 죽음을 천추의 한으로 품고 있는 세손이 복수를 시작한다면-
그것은 한 파벌의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총명하고 무예가 출중한 젊은 왕이 자신을 해하려던 조정신하들을 어찌 대할지, 그때 정국은 어떤 피바람을 맞게 될지 생각만 해도 등골이 서늘합니다.
자 이제 살 길을 찾으려면 대감께서 무엇을 해야 할 지 잘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지금 마음이 아주 바쁩니다.
허니 그리 오래 기다리지는 않을 것이요.
할 말을 잃은 이판의 얼굴을 세손은 보고 있습니다.
너희가 전하의 연민 덕분에 목숨은 보존하였다.
허나 그 일은 내 결코 잊지 않는다.
그 간악함으로 아바마마를 그리 원통하게 돌아가시게 하였거니, 전하의 권신이라 너희를 나는 지금은 어찌할 수 없다만, 내가 용상에 오르는 날 이대로는 두고 보지 않으리라.
살 길을 찾아 바삐 움직이라.
나는 이제부터 오래 참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