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밤들 3
시신을 목욕시키고 습(襲)을 하는 동안 나는 꼿꼿이 바라보았다.
양반가의 고명딸로 자라나 역시 세도가로 출가하여 평생을 남자들의 권력 언저리에 의지하여 살다 간 여인.
가문의 흥망성쇠와 함께 늘 바스라질것처럼 위태하던 어머니 몸은 넋이 물러서고 난 후에야 비로소 차갑고 단단해졌다. 마치 처음부터 나는 이렇게 완강했다는 듯이.
습을 마치고 영좌 위에 혼백을 설치하는 사이 주부(主婦)인 숙모가 소비를 눈짓으로 불렀다.
"여영이를 데리고 별당에 가 좀 쉬게 하여라. 이제 일은 숙부님과 네 오라비가 맡아 잘 모실 터이니.
어린 것이 울지도 못하고 얼어있구나. 안스러워서 어찌하누."
허청허청 소비를 따라 별당에 들어왔다.
불을 넣은 아랫목인데도 방안은 냉골인듯 추웠다.
소비가 따라 들어오다 떨고 앉은 나를 보고 기겁을 하였다.
"우리 애기씨 놀라셨네요. 아이구 가여워서 어찌할꼬."
"시끄럽다!"
눈물바람을 하는 소비를 날카롭게 쏘아부쳤다. 퉁퉁 부은 눈 아래를 옷고름으로 찍던 소비가 움찍하였다.
"미음이라도 가져오너라. 속이 헛헛해서 앉아있지 못하겠다."
"하지만 애기씨, 습을 하고 나면 사흘 동안 자식은 음식을 먹을 수 없는 것이 법도입니다."
"살고 나서야 법도도 있는 법이지. 어머니 따라 나도 같이 죽으란 말이냐? 날이 밝으면 문상객의 눈이 있어 먹고 싶어도 먹지 못할 것이다. 내가 기운을 내어야 어머니를 보내드릴 것 아니냐? 상주가 넋을 빼놓고 널부러지면 어머니 장례를 어찌할 것이냐?"
소비는 더는 아무 말하지 않고 방을 나갔다.
눈을 피해 가져 온 소반의 죽을 나는 알갱이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말끔히 먹어치웠다.
아무도 없다.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몇 년을 드나들며 집안을 지켜준다 믿었던 숙부가 찾던 것은 다른 것이었다.
친 오라비처럼 살갑고 정겹던 언주오라버니도 믿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어리고 남편도 없으니 이 집도 지킬 수 없다.
밤이 깊었다.
사랑채와 바깥마당에는 이따금 장작더미를 안고 오가는 사내 종들이나 솥에 물을 끓이는 계집종들의 소리가 들렸지만 안채 마당은 도무지 괴괴하기만 하였다.
나는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나는 어린 여자애다.
호상(護喪)과 주부(主婦), 사서(司書),사화(司貨)를 맡아 바쁜 숙부님댁 식구들은 오늘 어린 상주의 방을 들여다 볼 여유가 없을 것이다.
오늘 밤 뿐이다.
오늘 밤이 지나면 안 된다.
나는 안채 중문을 잠갔다.
방 안으로 들어와 다시 방문을 꼭꼭 잠그고 심호흡을 하였다.
보료 아래 감추어놓았던 어머니의 보자기를 꺼냈다. 손이 떨렸다.
귀퉁이를 단단히 여며놓은 무명천을 가위로 조심스럽게 잘라 꺼냈다.
그것은 두 손바닥을 겨우 덮을 작은 책이었다.
책의 뚜껑에는 타는 듯한 붉은 글씨로 두 글자가 써 있었다.
焚書.
불태워 없앨 책.
태워없애야 했으나 불살라지지 않은 이 작은 책으로 내 아버지가 죽었다 했다.
이 책을 찾기 위해, 가주(家主)가 죽고 세상에서 잊혀진 이 집으로 당대의 세도가 호판이 은밀히 사람을 보내 감시하였고 죽은 이의 동생이 몇 년을 빈 집을 뒤졌다.
죽은 이의 피로 새겨진 듯한 글씨를 나는 노려보았다.
아버지를 죽이고 또 누군가를 죽였을 이 책이 어찌하여 사라지지 않고 세상에 남아있던 것이냐. 이제 네가 나를 잡아먹을 것이냐.
나는 책 뚜껑을 가만히 열었다.
!
질끈 눈을 감았다 뜬 내 눈에는, 그러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텅 빈 백지였다.
첫 장을 넘기고 뒷 장, 또 뒷 장.. 두껍지 않은 책을 다 넘기도록 단 한 글자도 드러나지 않았다.
세월의 옷을 입은 누런 종이가 내가 넘길 때마다 묵은 먼지 냄새를 소르르 일으켰다 가라앉을 뿐, 익숙한 먹의 문자는 없었다.
나는 망연히 주저앉았다.
대저 책이란 것은 전하고자 하는 이의 뜻을 담아 문자로 남기는 것이 아니더냐.
문자가 남아있지 않은 빈 종이책을 어찌하여 굳이 불살라 없애라 이름을 담아 수 많은 목숨을 흔들었다는 말이냐.
나는 고요히 움직이는 등잔의 불꽃을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이 빈 책을 열어보았을까.
단단히 여며진 천의 솔기는 새 것이 아니었다.
오래 전에 만들어진 이 것을 어머니는 아마도 이 천에 싸인 채로 넘겨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빈 책인지도 모르고 목숨을 다해 지켰을 것이다.
허망하구나...
그렇다면, 더 지킬 것도 없다는 말이 아닌가.
나는 뚫어지게 책을 바라보았다.
몇 번을 되짚어 살핀 책에는 여전히 아무 것도 잡히지 않은 채였다.
나는 반짓고리를 찾아 가위로 자른 솔기를 다시 꼼꼼하게 꿰매었다.
둘러싼 보자기를 여러 번 꼬매 단단해진 책은 다시 처음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반짓고리를 닫다 비로소 처음으로 가슴이 메었다.
어머니가 남긴 손때 묻은 유품은 어쩌면 이 반짓고리 하나인 듯 하였다.
반짓고리를 쓰다듬으며 나도 몰래 눈물이 나왔다.
소비가 없어 다행이었다.
안채 중문의 잠긴 돌쩌귀를 풀었다.
돌담에 기대있던 달그림자가 바람에 슬쩍 흔들렸다.
달빛은 환하지 않았다.
*
注-
습은 시신을 청결하게 모시는 하나의 의식이다.
습을 마치면 자식들은 좌단(左袒)을 하고 영좌를 만들고 그 위에 혼백(魂帛)을 설치한다.
영좌는 죽은 자를 추모하기 위하여 전(奠)을 하고 혼백(魂帛)을 만들어놓을 수 있는 자리를 가리킨다. 혼백은 마포 등으로 만든 임시 신주로 나무신주를 만들기 이전에 사용한다. 혼백은 장사를 치른 뒤에 땅속에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