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낡은 서고

티아니 이야기

소금눈물 2011. 11. 28. 21:31

 

10/04/2010 04:03 pm공개조회수 1 0

기억력이 무뎌지는 것인지 내가 바보가 되어가는 건지, 분명 읽었는데도 생각해보면 전혀 읽어본 적 없는 것처럼 캄캄한 책이 있다. 기억은 가까운 것부터 지워진다 하더니 어려서 읽은 책들은 줄거리는 물론이고 세세한 표현이나 감동까지도 고스란히 떠오르는데 바로 얼마전에 읽은 소설책은 주인공은 물론 무슨 이야기였는지조차 백지처럼 아득하다.

이 책도 그랬다.
한참 중국어배운다고 돌아다닐때 초급반 선생님한테 선물받은 책인데 무슨 바람이 불어 책꽂이에서 꺼내 뒤적거리는데 정말 거짓말처럼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늘 책값에 쫓기고 시달리는터라 책값 굳어서 다행이라 위로하며 읽었다.

아...내가 이 책을 왜 기억못하고 있었던가. 이렇게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를.격동치는 시대의 소용돌이속에서 여리고 아름다운심성을 가진 인간은 얼마나 무력하고 슬픈 것인가. 하지만 그 무력하고 슬픈 인간은 시대를저주하거나모욕하지 않고기꺼이 자신의 생을 화폭으로 삼아그 짐승의 시간을 그려나간다.

한 여인과 두 남자. 누구 하나도 빠뜨리면 존재할 수 없는 이 완벽한 삼각형의 관계. 영혼의 쌍둥이처럼, 서로를 지탱하며 정신과 이상을 나누어 함께 존재하는 세 사람의 기묘하고 슬픈 사랑. 단지 사랑이라고, 단지 우정이라고도 할 수 없는 서로의 관계는 서로를 바라보며 팔을 뻗다. 시인인 하오랑과 화가인 티아니의 공통의 뮤즈인 메이. 지극한 사랑과 그 반대편인 결핍의 고통으로 이 세 사람이 문화혁명기의 혼란속에서 중국대륙과 프랑스에 나뉘어 고통스러워하다 결국 서로를 찾아가며 삶과 죽음을 넘나든다.

문화혁명의 소용돌이속에서 영혼을 더럽히지 못한 사람들은 삶 자체가처절한 형벌이 된다.최소한도의 인간의 존엄성마저 부정당하는 참혹한 수용소에서 만나는 인간군상들의 모습. 죽음을 늘 곁에 두고 영혼이 짓이겨지는 지옥인데도 그지옥에서 만나는 인간들의 모습은 사뭇 장엄하고 처연하도록 아름답다.끔찍한 사실을 전하는 필체는 너무나도 서정적이고 슬프도록 아름답다.어쩌면 이런 환경속에서, 이런 고통속에서 그 고통을 직시하면서 따라가는 시선은 티아니의 그림처럼 부드럽고 아름다우며, 하오랑의 단단하고 격조 높은 시처럼 결코 끝까지 추락할 수 없는 인간정신의 정점을 보여준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몇 번이고 책장을 덮고 가슴이 답답해져왔다. 책으로만, 역사로만 알아온 중국문화혁명, 사람이 사람이 될 수 없었던,이성과 정신을 갖추고서는 살 수가 없었던 짐승의 시간, 그 시대에 던져진다면 나처럼 관념적인 인간은 맨 처음에 그 칼날에짓이겨지고 바스라져버릴 것이다. 공포에 질려 누구의 고발이나 단죄가내려지기 전에 지레죽고 말 것이다. 누구도 시대와 나라를 선택해서 태어나는 인간은 없는 법이거늘,가늘고 천박하고 한없이 치졸하건만 그래도 이 목소리만큼을 낼 수 있는 내 지금이 얼마나 다행인가. 하지만 이 작고 보잘것없는 목소리라도 앞으로도 나는 가질 수 있을까. 두렵고 끔찍하지만 어쩐지 나는 자꾸 비관적이 된다. 그게 너무나 두렵다...

내게 가장 큰 감동으로 남은 인간은, 끔찍한 북방의 수용소에서 만난, 라오딩이었다. 지주이자 종교인으로, 그 끔찍한 수용소에서도 가장 무겁고 큰 벌을 견디고 있던 라오딩. 죽음과 삶을 초월해 어쩌면 이런 인간형이 존재할 수 있을까 범종소리같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소설의 도입부, 안개와 구름에 쌓인 루산을 바라보는 어린 티아니의 영혼. 이 소설 내내를 흐르는 그 부드럽고 알 수 없는 침묵과 경건한 산의 잔영이 흐른다.

쉽게 다시 읽기는 어려울 것 같다.하지만 <사람아 아, 사람아> 보다도 나는 이 책이 훨씬 더 깊이, 다가왔다.

제목 : 티아니 이야기
지은이 : 프랑수아 쳉
옮긴이 : 진인혜
펴낸 곳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