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낡은 서고

신들의 계보

소금눈물 2011. 11. 28. 21:13

 

01/30/2010 08:42 pm공개조회수 3 1


일전에 <문학의 탄생> 읽으면서 고대희랍 시인들을 찾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다행히 바로 연결해서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원전'번역이라니, 아무래도 낯설고 버걱거리리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편해서 좋았다.이 책은 헤시오도스가 남긴 책들의 묶음인가보다. 문학의 탄생에서 목록으로만 보았던 책들이 한 권에 묶여나왔다.

<일리아드>나 <변신이야기>가 워낙 화려하고 장대한 서사시여서 그런 이야기에 익숙해있다가 헤시오도스의 신통기나 일들과 날들 편은 좀 담백했다. 스타일의 차이겠지만 간간 같은 문체나 문장으로 이어지는 꾸밈말들이 좀 식상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신들과 인간의 전쟁사를 다룬일리아드에 비해, 평화로운 농경생활이나 도덕관념을 그린 면들은 왜 알렉산드리아시대에 호메로스보다헤시오도스가 사랑받았나를 느끼게했다.기나긴 전쟁에 지쳐 사람들은 좀 평화롭고 시대를 이끌만한 미덕있는 노래를 갈구하게 되었나보다.

그런데 이게 지나쳐 읽다가도 어이없는 웃음이 날 때가 있다. 난봉질의 대명사,아비를 힘으로 몰아내고 여자들이라면 신이든 인간이든 님프든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범하고 몰라라 버린 제우스가 온갖 위엄과 정의의 상징인양
형제의 침상에 올라 형제의 아내와 은밀히 교합함으로써 예의를 짓밟는 자도,
(중략-)
자신의 늙어가는 아버지에게 노년의 사악한 문턱에서 험한 말을 하며 대드는 자도
그런 자에게는 제우스께서 몸소 분개하시며 종국에는 그의 불의한 행동에 대해
엄중한 댓가를 치르게 하지요
(<일과 날들> 중)- 이런 표현을 보면 실소가 나온다.

지금의 관점으로는 이해가 안가는, 여성미에 대한 표현 중에서 가장 빈번히 나오는 꾸밈말 , '복사뼈가 예쁜','복사뼈가 날씬한' 이런 표현에 대해 알아볼 숙제도 남겨주었다.


다른 책보다는 드라마틱한 재미는 덜하다. 우주의 탄생 (곧 신들의 우주 주도권 쟁탈전)부분에 대해서는 좋았지만, <일과 날들> 부분이나 <여인들 목록> 부분에선 원전 그대로 헤시오도스를 만난다..그런 의미라면 몰라도 그 자체로선 뭐 딱히....

일과 날들은 동생에게 보내는 서간문 형태의 농사일력인데, 어쩌면 이렇게도 시시콜콜히, 얼마쯤 되는 소를 사라, 노예는 몇을 두어라, 옷을 짜되 씨실은 어떻게 하고 날실은 어떻게 해라, 온갖 잔소리를 책 한 권 두께로 늘어놓으며 종내는 좋지도 않는 험담과 꾸중으로 끝내는 이런 형을 두면 나 같으면 전혀 고맙다기보다는 화부터 날 것 같다. 문자라는 게 무서워서, 워낙 대단한 시인이 남긴 문장이라 역사를 건너와 지금까지 남았으니 저게 문화유산이다 하는 것이지 실제로 저 말을 들으며 골치를 썩었을 동생 입장에선 얼마나 반갑잖은 재산이었을까.


희랍의 신들은 인간과 어쩌면 그렇게 조금치도 다르지를 않아서, 싸우고 질투하고 계교를 꾸미고 서로 속고 속이는지, 게다가 성질도 급해서 그 대단한 신들이 미물인 인간에게 조금 섭섭했다 해서 바로 쫓아가 당장 복수하며 새나 물고기 따위로 바꾸어버리는 데에선 한심하다 여기겠으나, 요즘 우리 나라 돌아가는 꼬라지를 보며 '많이 참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불만이 머리 꼭대기까지 차 있는 내가 보기엔 일견 부럽기도 하다. (하기야 다른 인간에 대해 참으시는 하나님이 원망스럽지, 내 패악에 대해 참아주시는 하나님에 대해선 나도 할 말이 없어 꿀꺽 삼키는 이 이중성이라니)

옛얘기 좋아하면 가난해진다고 어른들이 흔히 그러지만, 내가 이 꼴로 사는 걸 보면 그 말씀은 진리였던 듯 싶다. 그래도 나는 옛얘기가 좋다. 문자 깨치고 처음으로 책다운 책으로 접했던 희랍신화가가 이 나이 먹어서도 이렇게 좋으니 아마도 늙어서도 그럴 터이고, 죽을 때까지 영 이 모양으로 살테지만 그래도 가난해도 이런 책이 옆에 있어서 나쁘지는 않다.


제목 : 신들의 계보
지은이: 헤시오도스
옮긴이 :천병희
펴낸 곳 :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