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낡은 서고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

소금눈물 2011. 11. 28. 20:50

 

03/28/2009 02:58 pm공개조회수 1 0

- 분노는 내려놓고 여유를 입은 뒤 비수를 품다- 라는 꼭지에서 일화들을 업어와 그대로 옮긴다. 이 책의 문장의 섬세한 결들, 그 문학적 아름다움도 책값을 아깝지 않게 생각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문향이 은은하게 배어든 고운 수필이면서 올곧은 선비정신이 서늘하게 품어져 나오는 결기들이 더 좋았다. 업어온 글들로감상을 대신한다. 원글의 문장법은 아니지만 화면에서 보기 편하게 일부 문단나누기를 바꾸었다. 띄어쓰기, 문단 나누기 하나 하나가 지은이의 깊은 고민과 생각을 담는 것이라 다른 때보다 더 몹시 미안하다.


조선 창업 직후 태조가 큰 잔치를 베풀었다.
자리 가득한 공신들 대부분은 고려 적에 영화를 누리던 사람들이었다. 새 왕조의 공신들 잔치이니 그 장한 분위기야 짐작할 만하다. 자리에선 기녀 설매雪梅가 술도 치고 노래도 하며 흥을 돋우었다. 취기가 무르익자 개국 1등 공신 배극렴이 설매를 희롱했다. "듣자니 너희들은 동가식 서가숙東家食 西家宿을 자주 한다는 구나. 오늘밤은 나와 함께 보내는 게 어떻겠느냐?" 주위 사람들이 무릎을 치며 웃음으로 장단을 맞추었다. 밑바닥에서 온갖 세파를 겪은지라, 설매는 농이 통할 길을 만들어놓고 노련하게 응수했다.

"어머나 정말요! 먹을 자리 잘 자리 가리지 않는 천기니, 왕씨를 섬겼다가 이씨를 섬기는 대감과 무엇이 다르리까? 사리에도 마땅하니 기꺼이 분부를 받들겠나이다."

배극렴은 낯빛이 하얘져 술잔을 떨어뜨리고 무리 속에 몸을 숨겼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등 여러 야담과 사서에 전해져오는 이야기이다. 설마 설매가 그랬을까마는,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은 설매의 이름으로 철마다 배를 갈아타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정객들을 조롱해왔다.

1484년 온갖 영화를 누린 한명회韓明澮(1415-87)는 한강 남쪽 가에 정자를 짓고 벼슬에서 물러날 뜻을 아뢰었다. 정자 이름은 압구狎鷗라 했으니, 갈매기와 가까이 지낸다는 말로 강호에 은거함을 뜻한다. 성종은 그를 옛날의 명신에 견주며 작별의 시를 지어주었다. 조정 문사들이 다투어 그 시에 화답했다. 모두 축하와 덕담 일색이었는데, 뒷사람들은 그중 최경지崔敬止(?-1479)의 시를 으뜸으로 꼽았다.

세 차례 부름받아 총애가두터우니 三接慇懃寵渥優
정자가 있다 한들 와서 놀 마음 없네 有亭無計得來遊
가슴속 끓는 욕심 고요케 한다면야 胸中政使機心靜
벼를 바다 가에서도 갈매기와 친할 것을 宦海前頭可狎鷗

처사의 맑은 이름은 얻고 싶고 작록爵祿은 버릴 수 없어, 겨우 한강가에 정자 하나 지어놓고 그마저 찾지 않았던 가식을 조롱한 것이다. 한명회는 최경지를 미워하여 이 시만은 정자에 걸지 않았지만, 수백 편 중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최경지의 시 한 수 뿐이다. (남효은. <추강냉화>)

심정沈貞(1471-1531)은 1519년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 등 신진사류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주역이다. 뒷날 그는 한강 가에 소요정逍遙亭을 지어놓고 다음 시를 새겨 걸었다. "젊어서는 사직을 떠받치다가, 늙어서는 강호에 누워 있노라靑春扶社稷, 白首臥江湖" 어느 날 밤 한 소년 협객이 들어와 머리채를 끌어 잡고, ‘부(扶)’와 ‘와(臥)’ 두 글자를 각각 ‘경(傾)’과 ‘오(汚)’로 고쳐 새길 것을 명했다. 시는 이렇게 바뀌었다. “젊어서는 사직을 기울여놓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히노라.(靑春傾社稷, 白首汚江湖)”(‘현호쇄담’)

소년 협객은 공론이 빚어낸 형상이고, 이 이야기가 장강처럼 유전되어온 것은 바로 역사이다. 심정은 공을 세우되 그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는 공성불거(功成弗居)의 처신을 흉내냈지만, 사직을 기울이고 강호를 더럽힌 사람이 되고 말았다. 공론과 역사가 살아있는 한 한 때의 허위와 가식은 달아날 길이 없다.

(p.141-142)

생각하니 배극렴, 한명회, 심정이 지금 한 둘일까마는 그들을 꾸짖을 설매, 최경지, 소년 협객이 있을까는 모르겠다. 아니그들은 최소한 부끄러움을 알아 얼굴을 가리우고 속으로만 미워하기라도 했다. 지금의 저 무리들은 그 가난한 염치 끝자락이라도 가진 것이 없으니, 국민들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수군대는 모양만 보아도 서둘러 잡아들여 제 추한 꼴을 가리려 하지 않는가.



제목 :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
지은이 : 이승수
펴낸 곳 : 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