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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왕후

소금눈물 2011. 11. 4. 16:55




정순왕후는 경주 김씨 김한구의 딸로 1745년(영조 21년) 경기도 여주에서 출생하여 1805년(순조15년)에 61세로 서거했다.
1759년 15세 때 66세였던 영조의 왕비로 간택되었는데, 당시 혜경궁 홍씨보다 열 살이나 아래였다.
정순왕후는 나이는 어렸지만 왕실 최고의 어른으로서 그 권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사도세자의 원행은 원래 극비에 부쳐진 것이었는데 영조가 알게 된 것은 정순왕후가 깊이 개입된 일이었다.
정조 즉위 이후 정순왕후는 홍국영 일당을 몰아낼 것을 주장하며 국정에 적극 개입하였다. 홍국영은 정순왕후의 오라비 김귀주를 몰아냈었다. 정순왕후는 홍국영이 왕실후계 문제에 개입하여 은언군 인과 그의 아들 상계군 담을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아버지 사도세자의 핏줄인 자신의 이복동생을 보호하기 위해 정조와 극렬한 대립을 하였다.
정조의 죽음이 과연 독살이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분명치 않지만 정사에서는 지나치게 정사에 몰입했던 정조의 과로사였다고 본다. 빛나는 업적의 완성을 눈앞에 두고 때이른 급작스런 죽음과 이후 정조가 키운 업적의 철저한 파괴와 그 세력의 몰락을 안타까워한 남인들의 원통한 그리움이 그의 죽음의 원인을 의심하게 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정조의 죽음은 그렇다 치고, 정조 주위에서 일어난 왕실 사람들의 비극적 죽음이 모두 의문사였다는 것이다.
정조 10년 중순왕후가 교서를 내려 그 죽음의 의문을 파헤치라 한 일련의 사건들이 그것이다.
그해 5월 문효세자의 죽음, 9월 의빈 성씨의 죽음, 그리고 11월 말 상계군 담의 급작스런 죽음들이었다. 그 죽음의 원인을 사도세자의 자식들에게 몰아 그들을 몰살하려 하였다.
그런데 그 사건의 과정에서 정순왕후가 예견한 일들이 기가막히게 들어맞았다. 그것은 예견이 아니라 어떤 계획과도 같아 보였다. 상계군의 궁비가 증거로 제시한 약봉지를 가져왔다고 진술하다 그것의 진실을 다 캐기도 전에 죽어버리기도 했다. 사건은 정확한 증거가 나지 않은 상태에서 정순왕후가 제기한 독살설이 사실로 드러나는 양 진행되었다.

정순왕후는 하나 남은 사도세자의 아들 은언군 인을 제거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정조가 들어주지 않자 단식을 단행하기도 했고 빨리 사형에 처하라고 신하들을 독려하기도 했다.
이에 정조는 대궐문을 닫고 상소를 차단하고 맞서 단식투쟁을 한다든지 신하들에게 욕을 퍼부으며 대비에게 저항하였다.

결국 은언군의 목숨은 구해 강화도에 유배하는 선에서 그쳤지만 정조는 일부러 정조를 만나러 가마를 보내기도 하고 강화부에 자신이 직접 가 만나기도 하면서 시위를 하였다.

정순왕후는 왜 그렇게 정조를 미워하고 사도세자의 후손들을 몰살하려 했을까.
그것은 "노론의 신임의리를 지키기 위해 가족관계라도 끊어버려야 한다"는는 16자 흉언에서 드러난다.
이 주장은 사도세자의 죽음 후부터 전파되어 힘을 얻었는데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홍봉한 정파에 속했던 일부 노론 강경파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면서 힘을 얻었다.
사도세자는 노론의리의 죄인이다. 그러므로 죄인의 아들인 왕세손(정조)도 왕위를 계승할 수 없다. 사정이 그러하니 이제는 태조의 자손 중 누구라도 왕위를 계승할 수 있지 않은가. 후사가 없는 정순왕후의 양자로 그 위를 잇게 한다. - 이것이 그들의 계획이었다.

정순왕후의 양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게 가능했는가.
이것이 가능하려면 사도세자의 자식들에게 이어지는 왕위계승권을 모조리 끊어버려야 했다. 그런데 이 발언대로라면 사도세자는 이미 죄인이므로 그의 후손이 왕위계승권을 가지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이 발언은 정순왕후의 거취와 직결되므로 막강한 그녀의 권력이 자행되던 생전에는 표면으로 올려 공론이 되는 게 불가능했다.
결국 그녀가 죽은 후에야 공개적으로 밝혀졌고 그로 인해 그녀의 세력들은 모두 제거되었다.

하지만 이미, 정조의 아쉬운 급서 이후, 철저하게 정조의 업적과 그의 신하들을 모조리 파괴하여 그의 정통을 이을만한 세력은 모두 사라진 뒤였고 정조의 특별한 보살핌을 받던 은인군 집안마저 모두 박살이 났다.

정순왕후가 강력하게 후원했던 노론 벽파는 정조의 치적을 지나치게 파괴해버렸기 때문에, 반남 박씨, 안동 김씨, 풍양 조씨, 그리고 규장각 출신 노론세력의 연합에 의해 몰락하고 말았다.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끝낸 직후인 1804년 (순조 4)의 일이다.
그리고 1805년 정순왕후가 죽고, 다음해 5월 김이영이 이른바 16자 흉언을 공개적으로 폭로함으로써 정순왕후를 제외한 벽파 소속 인물들은 정조의 정치원칙을 배신한 역적으로 단죄되었다.


- 참고 <영조와 정조의 나라-박광용지음>. <정치가 정조- 박현모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