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낡은 서고
책도둑
소금눈물
2011. 11. 28. 20:18
"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추천하게 될 책" 이라는 광고 카피는 맞는 말이었다.
마지막 책장을 덮은 것은 새벽이었는데, 감동으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창밖이 뿌얬다.
인간이 어쩌면 이렇게 아름다운가.
인간의 사랑은 어쩌면 이렇게 놀랍고도 슬픈가...
처절한 상황속에서도 굴할 수 없는 놀라운 인간애는 소금처럼 빛나고 아름다웠다.
역사에 남을 거대한 업적을 만든 영웅들도 아니고, 빈민가 골목 어디서도 마주치는 저 소박한 사람들의 용기와 인간들의 팔딱이는 심장 사이를 가로질러 가는 "죽음"의 담담하고 쓸쓸한 말들, 그 두 거리가 이토록 가까우면서도 뜨겁게 붙어있을 수 있는지...
이 책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죽음"이다.
낫을 들고 해골의 얼굴을 하고 검은 망토를 쓰고 바람처럼 스쳐지나가는 형상으로 표현되는 "죽음"이 이렇게 사려깊고 따뜻하고 슬픈 얼굴로 인간들의 언저리를 지나치고 있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 죽음의 신이 2차대전 속의 독일 힘멜이라는 작은 거리에서 마주친 한 소녀의 모습, 그 소녀의 첫 책도둑질로 눈길을 준 이래 이 책의 시선은 줄곧 그 소녀의 그림자를 따라간다.
나치치하에서 공산주의자는 유대인과 동격이다. 그것은 죽음의 표지였다.
공산주의자였던 부모, "아버지"란 단어를 익히지도 못한 어린 소녀 리젤은 눈보라속의 기차에서 동생의 죽음을 처음으로 목격한다. 양부모에게 동생과 함께 입양가던 겨울이었다.
생모는 그렇게 떠나버렸고, 소녀는 후버만 가족에게 입양이 된다. 손과 말이 거칠지만 정이 깊은 양어머니 로자, 세상 어디에도 없을 따뜻한 사랑과 놀라운 인간애를 갖고 있던 아버지 한스 후버만, 호시탐탐 리젤의 뽀뽀를 원하는 옆집 소년 루디. 그리고 힘멜거리의 따뜻한 이웃들...
부족한 배급표와 과도한 인정으로 후버만 가족은 더 배고프다. 하지만 악몽을 잠을 이루지 못하는 리젤에게 동생의 무덤에서 처음 훔친 책을 펴 글자를 가르쳐주는 아빠 한스. (그 책은 동생의 무덤을 파러온 소년이 잃어버린 "무덤파는 사람들을 위한 안내서"였다. 이 얼마나 은유적이고도 아이러니한 책인지)
리젤은 따뜻한 새가족에게 차츰차츰 마음을 열고 적응을 한다. 놀라운 속도로 말과 글에 빠져드는 리젤은 어머니에게 세탁물을 맡기는 시장댁의 책장에도 접근하게 되며 공습의 공포와 죽음의 위협을 "말들"에게서 위안을 얻는 것으로 이겨나간다.
그러던 어느날, 소리없이 찾아든 손님 막스.
부족해도 따뜻했던 이 가족은 폭풍과도 같은 위험한 소용돌이에 빠져든다.
게쉬타포, 숨겨진 지하실, 스물 두 달동안 볼 수 없는 하늘, 아코디언의 약속...
다른 사람들에게는 죽어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 그 가족에게 생긴다.
살얼음판같은 위험과 거세지는 연합군의 폭격속에서 그들은 서로를 그 비밀한 사랑과 침묵의 언어로 단단히 묶고 이겨나간다.
찢어진 축구공, 버려진 단추, 한줌의 눈, 맛없는 수프 속의 뜨거운 그 사랑들...
그들은 정말로 그들의 생명을 다해 세상을 사랑했고 그 사랑을 책속에 담는다.
고통스런 시간이 길어질 수록 그 가족은 필사적으로 작은 희망의 실마리를 리젤의 책 속에서 찾으려 한다.
책장 갈피갈피 눈꽃처럼 눈부시고 아름다운 추억들.
막스가 만들어준 두 권의 책, 사경을 헤메는 막스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그들의 약속대로) 거친 욕설을 퍼부으며 은밀히 전해주는 엄마, 끌려가는 유대인의 행렬에 병사들 모르게 빵을 던져주는 리젤과 루디, 아빠의 서툰 글자 가르치기, 다정한 아코디언 소리들, 그리고 떨리는 막스의 눈물젖은 손들, 차가운 루디의 입술에 전하는 리젤의 뽀뽀...
아... 다시 그 장면을 생각할 수록 가슴이 아리고 아프다.
모처럼 정말, "이야기"의 아름다움, "인간의 아름다움"을 눈물겹게 읽는다.
정말 그 끔찍한 전쟁 속에서 사람들은 본성을 잃지 않고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었을까. 그게 가능할까.
성가족같은 후버만네 가족이나 루디네, 분명히 나치였을 시장의 부인까지 그들은 그들이 가진 가장 귀한 것을 필사적으로 서로를 지키고 구원의 손길을 만든다. 심지어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죽음"조차 연민과 이해의 눈길로 바라볼 수가 있다.
정말 정말 별 다섯 개를 아낌없이 줄 책이다.
배경은 정말 비참하고 끔찍하지만, 그 참화에서 피어난 인간애는...이게 가능할까 정말... 가능하다고 믿고 싶다. 그 희망이 구원이 될 것 같다.
제목: 책도둑
지은이 : 마커스 주삭
옮긴이 : 정영목
펴낸 곳 :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