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옥사
잘도 일을 망쳐놓았구나!
세손을 역모로 몰아 축출하려고 했던 휘지모의가 수포로 돌아가고 이를 덮으려 벌인 알성시 시권 모의 마저 실패했을 뿐 아니라, 병판의 실수로 꼬리가 잡혀 옹주까지 드러났으니 정순왕후는 대노했습니다.
주상 앞에서가 아니라면 언제나 차가운 얼굴에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 여인.
세상의 나이로 치자면 한참 어린 사람이겠으나 이 여인의 얼음장 같은 한 마디에 중궁전을 찾은 승지와 이판의 얼굴이 얼어버렸습니다.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오늘밤 병판의 입을 막겠습니다.
이번 일을 꾸몄던 후겸.
책임을 면하지 못하겠지만 우선은 병판의 입을 막아 더 큰 불로 번지는 것을 막고자 합니다.
그건 좋은 방법이 아니다.
자객을 풀어 숨을 끊는다면 전하의 의혹만 커질 뿐이다.
허나 병판을 그대로 둔다면 결국엔 마마의 이름까지 거론되게 될 것입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것입니다.
이판의 우려에 정순왕후의 낮은 목소리가 서늘합니다.
너는 옹주에게 가서 전하거라.
전하의 용서를 받을 수 없다면 그 자리에서 죽어야 한다고.
예 마마.
두 사람은 알고 있습니다.
결코 그것은 허언이 아닐 것임을.
계획에 차질을 만든 사람이 해결을 하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국본인 세자를 모함에 빠뜨려 죽음에 몰아넣은 이 여인이, 옹주 아니라 그 누구라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임을.
왕후의 얼굴이 다시 굳어졌습니다.
서리가 내린 듯 한기가 도는 방 안은, 숨소리 조차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바람도 없는 의금부 옥사.
홀연히 석등의 촛불이 꺼져버립니다.
수직을 하던 옥사장들이 갑자기 사라지고 복면의 괴한들이 나타나 옥사의 불빛을 모두 지우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무엇일까!
이미 살기를 바랄 수 없는 병판, 그러나 불빛이 꺼쳐가는 옥사 마당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불현듯 깨달아집니다.
공포에 질린 병판 한준호.
미친 듯이 옥사장을 부르지만 괴한들은 귀도 눈도 없는 듯, 옥사의 죄인을 아랑곳 하지 않고 불을 모조리 꺼버리고 사라졌습니다.
흐린 달빛이 옥사의 지붕을 타고 흐르는 밤.
발자국 소리.
의금부의 두꺼운 문이 닫히면서 여인은 홀로 성큼성큼 들어섰습니다.
정순왕후!
이것이 무엇인지 병판은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선고입니다.
살기를 바라지 말라.
계율대로 왜 죽지 않고 그런 망령을 부렸느냐.
마마...
사시나무 떨 듯 후들거리던 병판이 꿇어 엎드렸습니다.
자객을 들이자는 말들이 있었지만 내가 반대했습니다.
대감께서는 그동안 많은 일들을 하셨으니 그에 걸맞는 예우를 해야 하는 법이지요.
그럼... 살 수 있다는 말일까요?
대감의 가문은 복원될 것입니다.
장자의 목숨도 지켜질 것이구요.
내가 허언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대감께서도 잘 아실 것입니다.
왕비는 지금 병판의 사후 일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허니 내 마음이 바뀌기 전에 대감께서 결심을 보여 주셔야겠습니다.
넋이 나간 병판을 뒤로 하고 왕후는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돌아섰습니다.
제 몫을 다 하고 있는 인간에게만 주어지는 가치..
아깝지만 병판은 이제 버려야 할 썩은 가지일 뿐입니다.
썩은 가지가 새 순을 다치지 않게 일찌감치 잘라내야 뒷 일을 다시 도모하지요.
이제 이 소동은 가라앉을 것입니다.
아무도 더는 다치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