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낡은 서고
히스토리아
소금눈물
2011. 11. 24. 21:27
긴 여행길이었다.
사랑의 말들, 말들의 사랑으로 시작한 고종석 읽기가 어느정도 정리되어가는 듯 하다. (전부는 아니다. 그는 참 어지간히도 바지런한 사람이다. 나 같은 게으름뱅이들이 쫓아가는 독서로는 너무 바쁘다)
고종석의 책에 대해서 뭐라고 말을 꺼내려다보면 나는 늘 할 말을 잃는다.
그의 책은 그저 읽다 밑줄을 그으며 혼자 생각하고, 그러다가 다시 끄덕이며 한숨을 쉬어가는 그런 책이지, 두고 이런저런 말을 떠들다치면 내가 하는 말이 참 어지간히 두서없고 쓸모도 없는 소음 뿐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다.
고종석이 왜 좋았을까.
그는불편한 사람이다.그는 도무지 의뭉을 떨며 달아날 구멍을 미리 살펴놓고 두루뭉수리하게넘어가버리지를 않는다. 우리 모두 의심없이 환호하고 감격하는 그것들도 그는 쉽게 자신을 물들여놓지를 못한다.
그는 주류, 일방적인 것, 절대적이라는 것들, 반론의 여지가 없으리라는 신념, 우리가 가장 지고의 가치로 믿는 것들에 대해 도무지 일단 수긍하고 보는 착한 자세를 가지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지금까지 의심없이 가져왔던 그 안전한 자리를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글쎄, 그게 정말 중요한 거야? 그게 그렇게 옳은 거였어? 그거 정말 우리가 그렇게 매달려야 하는 거 맞아? 아무래도 못 마땅해. 도무지 불편해...
고약한 사람이다.
나는 또 그의 간결하고 명확한 말투가 좋다.
치장하고 번잡을 떠는 것을 그는 거의 생래적으로 싫어하는 듯 하다. 미농지처럼 얇고 떨리는 이미지의 낱말을, 다른 어떤 표현으로 대치가 불가능하다 싶게 딱 맞춰 내놓는 걸 보면 그의 특장이 이런 건가 보다 싶은데, 세상읽기에서 보는 그의 한숨과 야유,거침없는 분노와 슬픔은, 앞에서 보았던 그 아름답고 적확한 쟁기질이, 음풍농월로만 보려던 이를 뜨끔하게 한다. 아름다운 말과 아름다운 글이, 화려한 표현과 이미지로만 생기지 않는다는 걸, 그의 글을 보면서 실감한다.
이 책은 한국일보에 실리고 있는 칼럼 <오늘>의 일부를 추려서 엮은 책이다.
1월 1일 부터, 매일 매일의 그 날짜에서, 그가 기억하는 역사의 주인공들, 사건들에 대한 기록과 그 기록을 보는 그의 이야기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과 사건도 있고, 처음 듣는 이야기나 사람도 물론 많다. 하지만 일관되게 이 책 속에 흐르는 그의 정서, 그가 하고픈 말은 내가 알거나 모르거나 하는 그 사건에 사실 큰 구애를 받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을 통한 그의 눈과 내 귀의 교감인 것이다.
예를 들어 7월 5일의 사람 <이한열>을 보자.
길지만 전문을 옮겨보겠다.
1987년 7월 5일 연세대 경영학과 학생 이한열이 서울 세브란스 병원 중환자실에서 숨졌다. 21세였다. 이한열은 그 해 6월 9일 '6.10 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 참석해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에 나섰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다. 그의 유해는 7월 9일 광주 망월동 묘역에 묻혔다.
그 해 1월 14일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아 숨진 서울대 언어학과 학생 박종철과 함께 이한열은 1987년 6월항쟁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박종철의 죽음은 6월항쟁의 도화선이었다. 항쟁은 6월 10일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 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 쟁취 범국민대회'로 시작됐다. 그리고 7월 9일의 '애국학생 고(故) 이한열 열사민주국민장'은 항쟁의 뒤풀이였다고 할 수 있다. 스물 갓 넘어 죽은 박종철이나 이한열의 이름 뒤에는 더러 '열사'라는 말이 붙는다. 그들의 죽음이 지닌 의미를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박종철이나 이한열이 그 시대의 별난 젊은이는 아니었다. 전두환 군부의 폭압 정치는 한 세대의 젊은이 다수를 잠재적 열사로 만들었다. 그것이 그 시대의 불행이었다.
전국적 시민 항쟁의 물결을 감당하지 못해 6월 29일 당시 집권당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 노태우가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인 뒤, 한국의 정치적 민주주의가 숨을 쉬기시작했다. 노태우는 비록 군인 출신 정치인이기는 했으나 대통령이 된 뒤 조심스럽게 민주화의 시동을 걸었다. 5년 뒤 김영삼은 31년 만의 민간인 출신 대통령이 되었고, 다시 5년 뒤 김대중은광복 뒤 첫 평화적 정권 교체의 주인공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15년 전이라면 상상하기도 힘들 만큼 자유로운 사회에서 살고 있다. 이 자유에는 박종철과 이한열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피가 배어 있다.
(밑줄 강조는 책장에 내가 저지른 짓이다.
옮겨적다보니 가슴이 울컥하여 한참을 자판위에 손을 놓고 멍하니 있었다.
그래, 박종철, 이한열... 당신들에게 우리는 이토록 많은 빚을 졌다.)
극히 건조한기사체의 문장으로 그 격동의 시간들을 담담히 그려나갔다. <사랑의 말들, 말들의 사랑>에서 보여주었던 그기가 막히게독특하고 선명한 이미지의 실체적 구현과는 엇비슷하면서도다르다.
그의 기사체 문장에서는 건조하고 단정하면서도 글 밑에서 꿈틀거리는뜨거움이 읽혀진다. 그는 미문으로 치장하려 하지 않고 꼭꼭 여미고마침표를 찍어가면서 힘을 주어 방점을 독자에게 새기는 이다. 예컨대 그에게는 치장의느낌표보다는 확인의 마침표가 어울리는것이다.
불편한 세상을, 신선노름하듯 유유자적하게 건너지를 못하고, 기어이 싫은 소리를 하고 눈살을 찌푸리며 돌이질을 하는 그가 좋다. 그의 결기가좋다. 화려하고 번뜩이는 재치와 문장들로 이름을 날리다,정작 그의행보를 보며 침을 뱉고 싶었던 이들이 한 둘이 아닌 작가세상에서, 나는 그가 작가든, 기자이든, 혹은 무슨무슨평론가이든 간에, 그잘나고 화려한무리에서 슬그머니 엉덩이를 비집고 비스무리하게 물들어가면서 음풍농월하는 모습을제발이지 보여주지 말았으면 좋겠다.
맨 마지막까지 깨어있는 자가 지식인이라고 그가 내게 알려주었다. 나는 그에게 지금 몽니를 부리고 있다. 말을 가르쳐주었으니 그 말대로 살아달라고 떼를 쓰는 참이다.
강준만,고종석.- 제발 지금 내가, 우리가보는 그 모습대로 열심히 써 주시고,열심히 불편해 해주시고, 열심히깨어있어주시라.
무지한 우리가 바라볼 사람들이 별로 없는 것만 같아 도무지 답답한 세상이다.
쥐꼬리만큼 늘어가는 통장잔고를 눈치보고, 쳐지는 허릿살에 한숨 짓는 것이 일상의 관심사의 전부가 되어버린 요즘, 그 사람들을 잊지 말라고, 이렇게 자꾸 우리를 불편하게 깨우는 사람이 그래도 얼마나 고마운지. 그리고 미안한지.
세상은 참 잘도 흘러가던데 말이다...
지식인도 뭣도 아닌 주제에 왜 내 잠은 이렇게 짧아지는지 한숨이 나오면서, 할 말도 아닌데 군더더기만 늘어간다...
젠장.
고종석, 아무튼 불편하기 그지없는 사람이다.
제목: 히스토리아
지은이 : 고종석
펴낸 곳 : 마음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