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낡은 서고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소금눈물
2011. 11. 24. 21:16
팔원 (八院)
- 서행시초 3
차디찬 아침인데
묘향산행 승합자동차는 텅하니 비어서
나이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오른다
옛말속같이 진진초록 새 저고리를 입고
손잔등이 밭고랑처럼 몹시도 터졌다
계집아이는 자성慈城으로 간다고 하는데
자성은 예서 삼백오십리 묘향산 백오십리
묘향산 어드메서 삼춘이 산다고 한다
쌔하얗게 얼은 자동차 유리창 밖에
내지인 주재소장 같은 어른과 어린아이 둘이 내임을 낸다
계집아이는 운다 느끼며 운다
텅 비인 차 안 한 구석에서 어느 한 사람도 눈을 씻는다
계집아이는 몇 해고 내지인 주재소장 집에서
밥을 짓고 걸레를 치고 아이보개를 하면서
이렇게 추운 아침에도 손이 꽁꽁 얼어서
찬물에 걸레를 쳤을 것이다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언젠가 올리면서
내 슬픈 종사관이 이렇게 흰 눈이 펄펄 내리는 초야에 묻혀 그렇게 살다갔으면 했다고 했다.
백석의 시를 다시 보노라니 불려올라오는 싯귀가 참으로 아름답고 서러운 그림이다.
마음으로 보는 그림, 싸락싸락 귀에 먼저 내리는 눈발처럼 그렇게 청각을 울리는 그림이다.
소월과는 완연히 그 그림의 색이 다르다.
백석의 시에는 참으로 많은 이들이 등장한다.
아기를 본다는 곰이 산다는 멀고도 깊은 산골
눈은 하염없이 내리고 무이징게국 끓이는 냄새가 담을 넘나드는 평안도
아이없는 노할머니와 튼튼한 북관계집과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간 딸을 둔 여승과
니차떡의 쫄깃한 맛과 청밀의 달큼한 추억,밀가루포대가 그득한 봉놋방의 시큼한 냄새들
그런것들이 모두 조분조분 어깨를 안고 잠들어있다.
나라를 잃은 설운 사람들과 아이들의 천진한 웃음들
그리고 그 와중에 삼백오십여리 어디 먼 산골, 어딘가에 있다는 삼촌의 집으로 하염없이 가는
저 어린 계집아이의 울음이 있다.
시가 이처럼 풍요롭고 아름다운 그림이었던가.
이렇게 아름답고 슬프고 정겨운 이야기였던가.
이 시절의 사람들은 그토록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서도 이렇게 따뜻하니 옹송그려 지나왔던가.
아름답되 처연하고
처연하되 청승맞지 않다.
참말로 백석은 그의 말대로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시를 지었고
그의 시도 그대로 외롭고 높고 쓸쓸하다.
이런 시가 있다는게
이런 시인이 우리에게 있었다는게
참말로 축복이었다.
우리의 무지하고 못난 역사가 그의 이름을 지우려 그리 애썼건만
다시금 그는 우리에게 축복이다.
제목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지은이 : 백석
엮은이: 백시나
펴낸 곳 : 다산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