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낡은 서고

달빛이 머무는 곳

소금눈물 2011. 11. 24. 16:27

09/11/2005 08:05 pm공개조회수 1 2




강 촌

마을을 안아 강이 흐르는데
여름의 대낮 한가롭기만
제비는 멋대로 처마를 나들고
갈매기는 가까이 가도 날아갈 줄 모른다
할멈은 종이에 바둑판을 그리고
아이는 바늘을 두들겨서 낚시를 만들고 있다
병 많은 몸 요긴키는 오직 약이니
이밖에야 무엇을 또 바라랴

- 두보

시원찮은 몸을 핑계대고 오늘은 하루종일 묵은 책만 뒤적였다.
보자...
앞장에 표시해 놓은 걸 보니 고 3때 7월 4일, 학기말 고사를 마치고 샀다고 써 있다.

도대체 이때는 왜 이렇게 터무니없이 무겁고 쓸쓸하고 허무적인 책만 골라 읽었을까.
날마다 신문을 덮는 대학생들의 분신과 점점 더 수위가 올라가던 나랏님들의 엄포. 그게 세상을 알지도 못하는 고등학생에게 도대체 무슨 무게를 주었던 것일까.
더구나 나는 그때 내가 지고 있는 짐만으로도 끔찍하게 괴로왔을 때였는데..

이 책도 사실 좀 엉뚱한 것이,
굉장히 이쁘게 장정이 되어서 비닐커버에 색깔고운 사진들까지 양념처럼 잘 끼워 있는데 꼭 모양새가 감상적인 소녀취향 그대로다.
쉽게는 절대 읽지 못할 唐詩集에 도대체 타겟을 어디로 한 건지...
아마 나처럼 조숙한 문학소녀취향에 맞추었던 건지...

개인이 감당하기 버거운 짐들은, 스스로의 숙명이라고 체념하거나 나를 위협하는 사회의 책임이라고 화살을 돌리거나..흔히 그럴 것이다.
체념이나 분노에서 벗어나는 길은 자신을 극도로 훈련시켜서 그 상황을 뛰어넘거나 반대로 도망치는 길이다.
나는 도망치는 쪽이었을게다. (예나 지금이나 비겁한 건 마찬가지다.)

그때 읽은 책들은 그렇게 하나같이 비극적이거나 터무니없이 높은 이상의 이야기거나 그랬다.
파라오의 무덤에 비치는 달빛 이야기에 매료된 것도 그때였고, 두보의 시 한구절을 중얼거리고 다닌 것도 그때였다. - 고백하거니와 그 시절을 지나서 이백이거나 두보거나 제대로 들여다본 적은 아주...드물다. 다모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원래가 좀 허무적이고 낭만적인 비극을 좋아하는 취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일 게다.
하긴...지금도 청전의 그림에 두보의 시를 얹어 읽다보니, 가을바람이 살랑 지나가는 저 창밖이 문득 버드나무 가지 흔들리는 한가롭고 쓸쓸한 강촌으로 변해서 그 바람소리가 물결소리로 지나가는 것만 같다.

가을에는, 마음이 가난한 이들이라면 두보의 시를 함부로 읽을 것이 아니다.
가을비 소리가 추적이고 지나가는 초당, 고적한 담장 아래를 나팔꽃이 비에 젖어 흔들리고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마음이 가을비에 젖어 어찌 그 밤을 시름없이 넘길 것인가.



제목 : 달빛이 머무는 곳
정리한 이 : 이원섭
펴낸 곳 : 어문각



그림 - 산수 (山水) - 이상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