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낡은 서고
입속의 검은 잎
소금눈물
2011. 11. 24. 15:44
어느 영혼이기에 아직도 가지 않고 문밖에서 서성이고 있느냐. 네 얼마나 세상을 축복하였길래 밤새 그 외로운 천형을 견디며 매달려 있느냐. 푸른 간유리 같은 대기 속에서 지친 별들 서둘러 제 빛을 끌어모으고 고단한 달도 야윈 낫의 형상으로 빈 밭에 힘없이 걸려 있다
--- 중략 ---
한때 너를 이루었던 검고 투명한 물의 날개로 떠오르려는가. 나 또한 얼마만큼 오래 냉각된 꿈속을 뒤척여야 진실로 즐거운 액체가 되어 내 생을 적실 것인가. 공중에는 빛나는 달의 귀 하나 걸려 고요히 세상을 엿듣고 있다. 오오, 네 어찌 죽음을 비웃을 것이냐 삶을 버려둘 것이냐, 너 사나운 영혼이여! 고드름이여.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
내가 팔월 한낮의 망월동을 찾아갔던 것은 무슨 뜨거운 마음이 새삼 돋아서도 아니었다.
남도를 돌던 이 문화부 기자가 망월동 묘역 제 3묘원에서 만난 한 村婦의 이야기를 보고서였다.
퍼머머리에 찌든 얼굴, 갈라진 두툼한 입술, 촛점이 흐린 눈동자.
"제가 한열이 선뱁니다. 연세대학교 선배예요."
"좋은 학교 보내면 뭘해요. 이렇게 되어버렸는데."
그 여인은 그의 후배의 어머니였다.
그는 그 뙤약볕 아래에 서 있었다고 했다.
나는 그의 유고집이 되어버린 산문집을 들고 망월동에 갔다.
그가 서 있던 곳에서 나도 서 있고 싶었다.
기형도.
앙상한 검은 얼음의 뼈를 들고 떠나버린 소년. 김현은 그의 시를 두고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고 했던가.
모르겠다. 나는 모르겠다.
우리문학의 성주였던 김현이, 요절한 시인에게 그런 인사를 슬프고 아프게 부쳤을때 그렇게 화려하고 빛나는 찬사를 다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에게 기형도는..그때 나에게 별이었다. 차갑게 빛나는 별나라로 가서 그 이름 자체가 다시 별이 된 사람. 그가 기형도였다.
안개가 끼는 공단의 방죽을 거쳐 잘못 말한 사랑이 창 가에서 우울하게 들여다보는 흐른 불빛 아래의 주점을 지나고 야윈 낫의 형상으로 고단한 달이 매달린 달밤을 그는 걸어갔다.
쓸쓸한 풀잎의 자손,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엄마를 기다리며 찬밥처럼 방에 담겨 (방에 담겨!) 제 연애 한자락 화려하게 하지 못하고 빈 방에서 갇혔던 그, 이 땅의 한때를 살다 그렇게 훌쩍 떠났다.
-그날, 마구 비틀거리는 겨울이었네.
-보아라, 쉬운 믿음은 얼마나 평안한 산책과도 같은 것이냐.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음울하고 고적한 이 목소리가 만 삼십세를 못 만들고 떠난 청년의 것이던가.
서늘하고 한없이 외롭고..그러면서도 가난과 외로움이 빚은 명징한 고드름 같은 이 목소리.
그의 시를 한꺼번에 다 불러올리기가 버겁다.
그의 한숨이 갈피마다 새겨진 낱말들. 끌고 오기가 무겁다.
그는 떠났다.
그렇게 , 때이른 죽음으로, 그가 남긴 말들은 그의 것이 되었고 누구도 그의 말들을 훔치지 못한 기형도만의 냄새로 만들고 그렇게 떠났다.
첫 시집을 유고집으로 만들고 떠난 기막힌 이 사람.
누군가 그의 길을 다시 갈까 겁이 난다고 했던가, 김현.
그의 길은 아무도 가지 못한다.
그것은 기형도가 만들고 지우고 가버린 길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썼던 뼈아픈 어떤 이의 회고에, 기형도의 죽음에 부친 김훈의 조사를 넣었었다.
(클릭..) 어울리지 못할 곳에도 부른 이 미련하고 글귀 어두운 이를 탓해주시라..
제목:입 속의 검은 잎
지은이: 기형도
펴낸곳: 문학과 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