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낡은 서고
몌별
소금눈물
2011. 11. 24. 15:33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지극히 사랑했다. 사랑한다는 이 진부한 표현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그 사랑은 그 사람의 온 마음과 생애를 결박해 버렸고 그러나 상대는 그걸 알지 못한다.
그에게는 생애 단 한번의 충격이었던 사랑은 또 그렇게 소리없이 지고 말고... 상대는 그가 죽은 후, 오랜 세월이 흐르고서야 그 사랑의 이야기를 듣는다.
어찌 보면 지극히 통속적인, 그래서 그런 이야기가 있다 해도 새삼 감동이나 눈물을 불러 일으키기 어려운 이야기다 이 몌별은.
몌별의 사전적 뜻은 소매만 스치듯 섭섭히 작별하는 것이란다. 그것을 작가는, 소매를 스칠듯 그 미미한 인연을 차마 소매를 놓지 못하는 아쉽고 간절한 사랑이라고 다시 바꾸어서 보여준다.
서른 한살의 평범한 여자 서현은 결혼한지 7년이 되었지만 아기가 없다. 어렸을때부터 집안 어른들끼리 맺은 정혼으로 결혼을 했지만 그 남편과도 다정하고 무난무탈한 결혼 생활을 해왔다.
그런데 해마다 7월 22일이 되면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과 이상한 떨림같은 것을 느낀다.
그런 여름의 어느날, 그녀는 불쑥 충동처럼 그녀가 대학에 다닐때 봉사활동을 갔던 시골학교로 찾아가는데 그녀의 회상 속에서 비로소 그녀가 만나고 싶었던 인물과 추억이 떠오른다.
어린 여대생 서현, 동아리 친구들과 왁자하게 갔던 그 '봉사' 같지 않은 농활봉사에서 만난 그 시골학교의 교사 강선생. 수줍고 말이 없던 청년, 노린재의 모성애를 학생들에게 보여주며 그녀의 마음에 천천히 물들여온 (당시는 , 아니 후로도 서현 본인도 그 마음을 짐작못했던!) 강선생.
다시 찾아간 학교는 폐교가 되어 있었고 선생의 흔적을 찾으면서 드러나는 그 뒤의 이야기.
강선생은 7년전에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서현이 봉사활동을 하던 해의 이듬해, 불쑥 다시 찾아가서 그와 짧은 만남을 갖고 또 바람처럼 다시 돌아왔던 어느날..그 후 그의 오래고 슬픈 서현에 대한 사랑의 이야기가 그가 죽은 후 그렇게 세월이 흘러서야 그녀에게 닿은 것이다.
바람처럼 불쑥 찾아가서, 점심을 먹는 강선생의 마루에 천연덕스럽게 마주 붙어서 찬밥에 상추쌈을 싸서 먹고, 머리를 감고, 뒤뜰에 핀 쑥갓꽃을 감탄하다 철없는 누이의 급작스런 방문처럼 한나절 놀고 떠나온 서현이었다.
글쎄..그게 그저 '불현듯'이었을까... 그녀가 떠나면서 그 집에 꽂혀있던 시집 앞쪽에 선생님이 안계신 사이 떠난다는 인삿말을 남기고, 그의 쓸쓸한 눈길이 그 시집에 오래 머무는 것을 동료들에게 보이면서..그게 그저 어느 여름 한나절의 우연한 일별에 불과했던 것일까...
모든 것이 불꽃같고 전쟁같다. 사랑도 어쩌면 그런 것이 진정이고 그래야 더 깊은 마음인 것만 같은 요즘이다. 그런데..그런 요란하고 뜨거운 사랑의 뒷모습이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오래 붙잡고 지탱해주는 기둥이 되었는지는 말이 없다.
몌별에서는, 그 현실에서는 사랑이라고 말하기도 어쩐지 어려운 그런 아릿하고 미진해보이는 연정의 뒷모습에서, 어린 새끼를 품는 노린재의 놀라운 사랑과, 두 남녀의 정이 시골집 뒷마당에 핀 철이 늦어가는 노란색 쑥갓꽃에 투영된다. 그리고 수풀이 우거진 그의 무덤가에 핀 노란 쑥방망이... 노란색은 노린재 등의 노란 하트무늬와 함께 강선생의 쓸쓸하고 처연한 숨은 사랑의 빛깔이기도 했다.
비로소 7년이 지난 후에야 그녀가 알게 된 사실. 해마다 그녀가 그 날이면 그토록 힘겹고 불안했던 원인, 7월 22일은 그가 죽은 날이었다.
어쩌면 이 사랑의 모습은, 우리가 흔히 말하면서도 또 그만큼 믿지도 않는 전설같은, 흔적같은 낱말 "인연"에 대해서 말하는 지도 모른다. 그렇게 스쳐갔지만 그 스쳐감이 그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만남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지고 또 그렇게 멀어져갔다는 ...
그의 사랑을 뒤늦게 듣고, 사실은 그 모든 여정속에서 서현 자신도 그를 강선생의 방식 그대로 그를 사랑했었음을 깨달으며 그녀는 아이를 입양한다. "노란"천인국을 손에 들고 있던 아이... 여섯차례나 입양을 거절하면서 그녀와의 인연을 기다리고 있던 그 아이. 7월 23일을 다른 인연의 탄생으로 맞아들이면서 그녀는 강선생에게 전한다.
- 선생님.
저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인연이란, 스치듯 지나치는 순간 바람처럼 이는 것이라는 걸 말입니다. 그런 결코 스치듯 지나쳐버리고 말 수는 없는 것이라는 걸 말입니다. 그냥 스쳐 지나버림으로써 초래되는 결과가 얼마나 가혹한 것인지를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인연이라는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되겠다.
어떤 사람도, 평생을 기울인 사랑에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는가..
인연이란, 시작할 때 묻는 것이 아니고 끝날 때에 묻는 것이라고.
이 책을 덮을 즈음, 쑥갓의 노란 꽃이 아득히 먼 별처럼 새삼 깊어보였다.
제목: 몌별
지은이:구효서
펴낸곳: 세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