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낡은 서고
무지개와 프리즘
소금눈물
2011. 11. 24. 15:25
문자를 깨쳤다는 것이 정말 다행이라는 것, 그 문자로 가보지 않은 세상이나 만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해 듣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더 행복하는 것, 이윤기의 책을 읽을 때마다 하는 생각이다.
우리나라에서 이윤기를 빼놓고 그리스 로마 신화를 말할 수 있을까.
그가 들려주는 저 아득한 먼 나라의 황금시대, 신과 인간이 겨루고 사랑하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이토록이나 황홀하고 행복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을까. 20년간 거의 200여권에 달하는 역서를 내고 자기 작품집만도 몇 권인가. 그 땅의 정서와 역사적, 사회적 배경이 녹여 만든 원글이 낸 땅을 건너서 다른 언어권으로 건너가는 글을 번역하는 것은 어차피 반역(反譯,혹은 半譯)이라고 하지만 이윤기의 눈으로 읽는 신화이야기는 그 자체로도 황홀하다.
유수의 문학상(동인문학상)을 수상한 창작가에게 훌륭한 번역가로서 먼저 기억되는 것은 어쩌면 대단히 실례되는 일이겠지만 어쩌랴, 나에게 그는 그 세계로의 창을 열어주고 닦아준 얼굴로서가 더 크니.
이 책은 신화이야기도 아니고 소설집도 아니다. 그런 사람 이윤기가 쓴 수필집이다. 물론 그가 쓴 수필이니 그 글의 색깔이나 모양이 어떨지 짐작은 가시리라. 육조 혜능으로 시작한 동양의 정신문화와 깊이에 대한 단상, 탈레스, 플라톤, 소크라테스를 넘나드는 그리스 철학자들에 대한 이야기,“피핑 톰”의 어원에 얽힌 사회읽기와 북플래너 정병규 이야기에 담긴 아름다운 사람들에 대한 회고. 그리고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고하는 간절하고 따뜻한 우려, 이국의 호숫가에서 쓰는 문학과 문화이야기... 이런저런 세상이야기, 그 세상을 보는 아름다운 창- 문화 이야기....
이 책을 읽다가 가지가 쳐진 도서구입목록이 얼마나 늘었던지. 대단한 박학다식. 게다가 그 재산을 풀어 아름다운 비단천을 새로 짜 보여주는 문장. 문화를 안다는 것과 그 책을 읽을 줄 안다는 것의 다행스러움은 바로 이런 것이지 않겠는가.
번번이, 강매하는 호객꾼 같은 말투가 되어버렸지만 가을날 읽기에 정말 좋은 수필집이다. 읽고나면 언어의 어원이나 상징코드에 대해 몇가지 자랑할만한 지식도 꽤 는다 ^^;;
*관음증, 또는 훔쳐보기 좋아하는 호색한이라는 뜻을 지닌 피핑 톰(peeping Tom)은 위 그림의 주인공 고다이버의 이야기에 나온다. 11세기 영국, 농노들을 괴롭히던 영주 레오프릭의 아내 고다이버는 아름답고 긴 머리로도 유명했다. 무자비한 세금수탈에 시달리던 농노들을 위해 남편에게 간청한 고다이버는 옷을 벗고 영지를 하루종일 돌아다니고 이 모습을 성 안의 아무도 보지 않는다면 세금을 감면해주기로 허락을 받는다. 고다이버는 맨 몸으로 말을 타고 하루종일 성 안을 돌았고 성안의 농노들은 문과 창에 모두 두꺼운 커튼을 치고 마음 착한 영주 아내의 나체를 아무도 보지 않았다. 결국 영주는 약속대로 세금을 감면해주었는데, 고다이버의 모습을 본 이가 딱 하나 있었다. 소문난 고다이버의 미모를 바늘구멍을 뚫고 기어코 본 이가 있었으니 그가 톰이었다. 작은 바늘구멍에 눈을 대고 하루종일 엿본 톰은 안압이 한없이 올라가 눈이 멀고 말았다는데 엿보는 톰(peeping Tom)의 유래는 바로 이것이다.
이윤기씨는 이 이야기 꼭지의 제목을 이렇게 붙였다.
-옷은 이럴 때 벗는 것이다....
제목: 무지개와 프리즘
지은이: 이윤기
펴낸곳:생각의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