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낡은 서고
관촌수필
소금눈물
2011. 11. 24. 15:12
도대체가 뭔 깊은 심중의 생각 한 오리 없이, 떠오르는대로 불러보고 질러보고 가 보는 인간인지라 턱없이 책이야기를 해보겠다고 툭 던져놓고는 뒷감당을 못하고 하루종일을 머리만 뒤적거렸다.
생각해보니 내가 읽은 책들의 한계도 한계려니와 그 가난한 재산 중에서도 "올릴 만~ " 한 것을 또 추렴을 대강이라도 해야하니 머리속만 왕왕거리고 내가 왜 시작을 했던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케스트너의 <날으는 교실>부터, 김소월의 <진달래꽃> 마빈 해리스의 <문화의 수수께끼>같은 것들이, 갈래도 순서도 없이 우다다다 지나갔다가 또 그처럼 사라지는 지경이다.
그런데 어젯밤은 또 예기치 못한 난감함으로 일찌감치 뻗어버렸다.
관촌수필...
관촌수필을 뒤적이다 책장을 보니 이런~!!
<우리동네>며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가 보이지 않는다.
지난 봄에 내 집에 들른 후배가 책장을 뒤적거리다 많지도 않은 책 중에서 그걸 꺼내 가더니 차일피일 회수를 미루다 어느새 나도 잊어먹었나 보다.
그 밤에 그걸 또 채근하겠다고 전화를 걸어서 엉뚱한 세상일만 늘어놓다가 말도 못 꺼내고 끊어버렸다.
깝깝한 인사하곤!!~
관촌수필을 꺼내놓고 몇 구절 올리다가, 이 책에 다시 빠져 아예 컴퓨터는 팽개치고 밤을 새 다시 읽었다.
그러고보니, 예전에 나온 책이라 활자체도 작고 빡빡하여 눈이 여간 피곤하지 않다.
그래도 책장을 넘기다보니 책장이 그예 밤을 잡아먹고 말았다.
관촌수필은...딱히 어떤 이야기고 어떻게 읽는가고 할 말이 없다.
우리가 버린 고향이고 떠나온 고향이면서, 그 고향이 어땠던가, 고향 탯자리의 아름다움과 슬픔, 거기서 살았던 사람들의 가난하고 정겨운 세상에 대한 이야기면서 또 외면할 수 없는 이 땅의 아픈 역사의 할큄이 그대로 남은 우리네 지난 살이의 흑백사진이기 때문이다.
세모에 성묘를 하겠다고 고향을 찾아가는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상것들이나 왜놈 세력(歲歷)을 세는 법이라 꾸중을 하실 돌아간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귀향한 필자는 그런데 마을 앞에서 왕솔 한 그루의 사라짐을 보고 고향의 망실을 직감한다.
그러면서 사대부의 뿌리면서 마지막이 되고만 할아버지에 대한 회상, 집안뜰을 오가던- 어머니, 하녀 옹점이, 마지막 유가였던 할아버지와 대척을 이루던 진보적인 아버지(그예는 참혹한 죽음으로 당신과 집안의 몰락을 만든 "사상"),드나들던 동네 사람들, 이런저런 인물들에 대한 회고와 그리움이 이 책의 주요 줄거리다.
내게는 또 유별나게 각별한 것이, 일찌감치 고향을 떠남으로 나 또한 이 나이에 실향을 운운할 어처구니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는데 (아마도 사는 꼴을 보아하니 빠른 세월이 돌아갈 일이 없을 듯 하니 말이다) 내가 가졌던 말들의 모태가 고스란히 이 책에는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사상에 물든 주인 아저씨를 붙잡아가기 위해 순경이 치달아 왔을때 부엌떼기 옹점이를 잡고 드잡이를 하는 장면이다
"증말루 이집 애여?"
"또 물어유?"
다소 무안을 느꼈는지 순경을 거칠어진 음성으로 되물었다. 그녀도 독오른 눈을 감그려끄리면서 대꾸했다.
"그짓말허면 워디 가는 중 알지? 신세 조지지 말구 순순히 대답혀"
"자던 사람 대이구 말시키먼 하품 나와유"
"그야 고단헐 테지. 손님 밥을 일곱 번이나 지었으니께"
누가 오면 으레 밥을 새로 지어 대접해온 터이므로 식객이 몇이었던가를 알려는 유도심문이었으나 그만한 눈치가 없을 옹점이는 아니었다.
"넘으 집 안살림을 워치기 그리 잘 아슈. 그 개갈 안 나는 소리 웬만큼 허슈"
"야, 굴뚝에서 일곱 번 연기난 것을 본 사람이 있어"
"워떤 옘병허다 용 못 쓰구 뎌질 것이 그류? 밥 짓구 국 끓이구 찌개허면 하루 시끼니께 연기가 아홉 번 나지 워째서 해필 일곱 번이여. 끈나풀을 삼어도 워째서 그런 들 익은 것으루 삼었으까. 그런 눈깔을 빼서 개 줄 늠 같으니."
"......"
"워떤 용천(나병)허다 올러감사헐 것이 그런 그짓말을 헙듀? 찢어서 젓 담글 늠. 그런 것은 안잡어가유?"
순경은 그녀의 걸찍한 구습에 질려 부쩌지 못하다 말고, 사랑 재떨이에 왠 담재꽁초가 그리 수북하냐고 다시 휘어서 물었다.
"이 동네 마실꾼들은 담배두 못 핀대유?"
"이 동네 마실 꾼들이 누구냔 말여."
"바깥 마실꾼을 안이서 워치게 알유. 내외허는 댁인디."
"동네 마실꾼인디 모란 공작 부용 같은 궐연을 피여?"
"허가 읎이 잎담배 말어 피면 잽혀간다메유."
"너 멫 살 먹었네?"
"멥쌀두 먹구 찹쌀두 먹구, 열두 가지 곡석 다 먹었슈."
하고 나서 그녀는 치맛자락 밑으로 어슬렁대던 검둥이 뱃구레에 냅다 발길질을 하며,
"이런 육시럴늠으 가이색깃 지랄허구 자빠졌네. 주둥패기 뒀다가 뭐허구 이 지랄허여. 너 니열버텀 잘 굶었다. 생전 밥 구경을 시키나 봐라."
하고 거듭 발길질을 하여 금방 어떻게 되는 비명 소리가 들리도록 하였다.
내가 듣기에도 담 넘어 들어오는 순경을 물어뜯지 않았다는 핀잔이었다.
한없이 느려터지고 유순해보여서 맘좋고 속없는 것이 충청도 사람의 기질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무슨 변란이 생길때면 의례 먼저 일어서고 끝까지 독했던 이들이 또 충청도의 뿌리였다.
다른 고장과 달리 큰 산과 강물이 별로 없고 너른 들판에서 경작하여 대대를 이었는고로 삶이 비교적 순탄하고 느리고 높낮이가 크지 않은 말을 가졌으나, 함께 어울려 농사를 짓고 어울려야 하는 삶이, 고단한 살이를 의뭉스럽게 눙치고 깝치는 말솜씨들로 남았음은 짐작이 어렵지 않다.
직접적으로 댓거리를 하는 것을 양반답지 못하다는 정서때문인지, 지금도 무슨 여론조사하면 제일 짐작하기 어려운게 충청도 민심이라든가.
( 몰라유~ 알아서 뭐 할라고 그려유~)
그 엄혹한 시절에는 누구보다 당당하고 권세있는 순경이, 고작 열 댓살 조무라기 식모아이에게 된통 당하는 이 장면은 단순한 말장난을 넘어 힘을 무기로 압제하는 것들에 대한 분노와 조롱이 그대로 담겼다.
마치 마당놀이의 한 장면처럼 통쾌하고 뒷끝이 짜릿하기까지 한 것이다.
아들을 그렇게 참혹하게 보내고, 어린 손자에 지극한 사랑을 다하면서 무너지는 당신의 세상을 쓸쓸하게 마쳤을 할아버지, 또 그런 고향...그 고향을 찾은 나이든 손자...
뒤란 구석의 질경이 풀같던 옹점이에 대한 뒷 이야기, 고향 친구들의 낭자한 육담속에 스민 허물어지는 농촌의 가슴 아픈 현실..
고향은 아름답기가 전부도 아니었고 슬픔과 서러움만이 전부도 아니었다.
어..어쩌면 이렇게 묵은 이불의 냄새처럼 텁텁하고 포근한 것인가.
나중에 어느 술자리에서, 이문구 선생의 애제자였으면서 내 선생이기도 했던 분께 옹점이의 뒷얘기를 여쭈었는데 나중에 어찌되었다는 말은 기억에 없다. (이런 깡통~) 쓸쓸하고 처연한 후일담이었던 기억은 난다.
그러고보니 이문구 선생 가시고 한 해, 봄 여름이 지났다.
선생이 고향 마을 앞의 왕솔 빈자리를 보고 허전해 하셨듯이 지금 우리가 그렇다.
-일찌감치 고향 팔아먹으면 나중에 뭐 쓸려고 그러니.
한창훈 선생님의 답답한 말씀이 귓가에 쟁쟁하나, 실상은 팔아먹고 말아먹고할 고향마저 내겐 없는 셈이니...
다시 읽어봐야겠다.
제목 : 관촌수필
지은이: 이문구
출판사: 문학과 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