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낡은 서고

꽃지는 저녁은 바라보지 말라

소금눈물 2011. 11. 24. 15:11

 

09/20/2004 11:23 pm공개조회수 1 15




비는 눈물같이 줄창 내리고
창은 보랏빛으로 젖어 있다
나는 저 산쪽
외로운 한 사람을 생각하노라.

그대 생은 어디 있는가.
가고 없는 사람은 생각 말고
돌아올 사람도 생각지 말자.

한 떨기 풀잎을 바라보자.
그냥 그 뜻대로 지고
산천도 언제나 조용하게 저물었다.

인간은 다 어디로 갔나.

<비는 줄창 내리고>

종일 비가 내렸다.
창문을 긋고 가는 빗소리가, 귀에 와 닿지 않고 가슴뼈에 머물러 젖는다.
가을비는 눈보다, 귀보다...가슴으로 와서 잠드는 베겟가에 이르러 비로소 발길을 멈춘다.

열시에 자나, 새벽 두 시에 자나 눈 뜨는 건 대개 네시쯤 전후다.
고요한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머리맡을 더듬어 습관처럼 열어보는 책이 바로 이 것이다.
내게 꼭 한 권의 시집을 가지라면 나는 주저없이 이 작은 시집 하나를 구할 것이다.
박정만에 대해서라면...할 말이 참 많은 것 같기도한데, 할 수 있는 말은 참 적다.

박정만...
눈물어린 목소리로, 속절없는 일평생 사이의 초록바람과 저 세상의 대청 마루 한 쪽, 받을 이 없는 편지, 눈물어린 날의 술잔...그런 것들을 그리고 부르던..천상 꽃 같고 물 같던 그 시인..
광주학살의 추악한 핏자국을 감추려고 벌였던 허깨비 장난 국풍 와중에, 그는 다른 문인의 필화에 휩쓸려 들어가서 사흘동안 종적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몸을 못가누면서 집으로 들어왔을때 그는 사흘 전의 그 사람이 아니었고, 다시는 그의 몸도 혼도 돌아가지 못했다.
시간을 그려가며 미친 듯이 썼던, 아니 피로 토했던 그의 시, 절망과 한과 미칠듯한 그리움의 그 낱말들..
술이 그를 먹어들어가던 지독한 가난과 병고의 나날, 아내는 떠났고, 그리고 두 아이를 남겨두고 그도 이 세상을 버렸다. 그의 운명을 지킨 이는 아무도 없이 홀로 그렇게 갔다.
그의 육신과 정신을 찢어발긴 정권이, 치부를 감추기 위해 벌였던 올림픽이 막을 내리던 88년 10월 2일이었다.

그의 시는 말로 씌어져 있으되 그려진 것은 물빛이다.
눈물빛이고 강물빛이고 빗물빛이다.
그리고 이 모든 시는 시인이 간 별나라의 꿈빛이다.

내가 박정만을 다시 펴든 것은, 언젠가 말했듯이 윤을 만나고 부터다.
나는 그의 갈피 갈피서 88년에 간경화로, 아니 정권의 칼로 죽은 시인을 만나고, 또 1693년에 이 별을 떠난 한 사람을 다시 만난다.
그는 박정만의 시속에서 얼굴을 드러내어 내게 나지막히 속삭인다.
윤이 옥사에 갖혀, 어린 중노미를 시켜 전했던 편지..

-내가 있거나 없거나 너의 신산한 세상살이가 무에 달라지겠나마는...

그 나지막한 음성에 나는 이 시를 얹어서 그를 목메이게 부른 날이 있었다


그대에게 주노라,
쓸쓸하고 못내 외로운 이 편지를.

몇 글자 적노니
서럽다는 말은 말기를.
그러나 이 슬픔 또한 없기를.

사람이 살아 있을 때
그 사람 볼 일이요,
그 사람 없을 때 또한 잊을 일이다.

언제 우리가 사랑했던가,
그 사랑 기울면
날 기우는 줄 알 일이요,
날 기울면 사랑도 끝날 일이다.

하루 일 다 끝날 때 끝남이로다.

<마지막 편지>


그러니 내게 이 시집은, 내가 지금 가장 사랑한 두 사람의 목소리가 하나로 얽혀 나를 지금의 나이게 하는 셈이다.

앞 사연만 듣고 박정만의 시를 혹시라도 정치나 다른 이념의 무게를 얹어 볼 생각이라면, 부질없는 짓이라는 걸 말해두고 싶다.
그는 저쪽 나라의 푸른 대청 한 칸을 두고 새소리를 들으며 낮잠자는게 꿈이던, 한 생을 하루 해에 던져놓은 채 그 혼곤한 잠을 꿈꾸던 그런 사람이었고 그런 시였으니 말이다.

여기까지 쓰고 잠깐 밖에 나가보았다.
아직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아마도 밤새도록 오실 모양이다.
더는 말고, 이 쯤에서 컴퓨터를 끄고 다시 시집을 켜야겠다.
종일 가랑비 오시는 날이면, 아니 가을비가 내쳐 밤을 적시는 날이라면 마음껏 젖어도 좋다.
살다보면, 고적한 날의 행복이 어디 그리 흔하랴.

박정만이 누구였는가..
그의 시 빛은 어떤 것이었는가 그래도 궁금하다면
이 집의 이 폴더 아래쪽을 보면 간간 등장하리라.

너무 오래 이 눈물나는 사랑과 연민을 들여다보고 있는 때문에, 내 다모의 정인들이 덩달아 눈물빛에 젖어버린 건 아닌지...나는 참 미안하고 아프다..

이 시집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나는 사라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

<終詩>

그는 그렇게 우주 속으로 사라졌다....




제목 : 꽃 지는 저녁은 바라보지 말라
지은이 : 박정만
출판사 : 큰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