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돌말사람들

민달팽이 -5

소금눈물 2011. 11. 21. 16:12

09/22/2004 02:07 pm공개조회수 0 0




시어머니가 문을 우당탕 열어젖히는데서 새벽잠을 깨었다.
시아버지께서 가지냉국을 잡숫고 싶단다.
내내 뜨거운 국만 찾길래 콩나물이라도 다듬어야 하나 저녁에 생각해두었던 경숙은 콩나물을 포기하고 밭으로 나갔다.

이슬이 마르지 않는 아침은 제법 선선했다.
밭고랑을 돌아보며 통통한 가지를 몇 개 따는데 가지포기 아래 풀더미에서 무언가 물컹하다.
들여다보니 새끼손가락만한 민달팽이 한 마리가 풀잎사이에서 꼬무락거리고 있었다.

연갈색 물컹한 몸뚱이를 끌고 느릿느릿 잎사귀를 기어가는 것을 보니 경숙은 한숨이 나왔다.
우렁이나 달팽이는 제 몸 집어넣을 집이라도 있지 의지할 껍데기 하나 없이 살아가는 꼴이 나와 똑같구나 싶었다.
경숙은 밭고랑에 쪼그리고 앉아서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해가 떠오르기 전에 몸뚱이를 감출 그늘을 찾아서 제 딴에는 부지런히 몸을 놀린다고 하는 기색이나, 도무지 꾸물텅거리는게 영 갈 길이 캄캄이다.

민달팽이가 올라앉은 풀잎을 똑 따서 풀더미 속으로 밀어넣었다.
채소잎을 몽땅 갉아먹는 해충이니 그걸 그냥 두었다고 지청구를 먹을 일인지 모르겠으나 경숙은 그 민달팽이를 잡아죽이지를 못했다.

"아침 거리 준비하세요?"

나온 김에 풋고추까지 몇 개 더 따서 바구니에 넣고 밭고랑을 나오는데 누군가 아는 척을 했다.
인사는 없었으나 언덕 너머 초등학교의 선생이란 것은 알아보았다.
남편이 그 학교에 다닐 무렵에는 제법 규모가 큰 학교였다는 말을 들었는데, 아이들 울음소리가 드믈어진 요즘에는 한 학년에 서넛도 버거워서 분교같아진 처지였다.

"아 예...."
"고추가 좋네요. 아주 잘 여물었어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우물쭈물하던 선생이 슬쩍 집쪽을 넘겨다보더니

"저....그런데 집에 어린이 있지요?"
"네....그런데요?"
"나이가...."
"올해 일곱살입니다"
"그럼 내년에는 학교에 가야겠군요"
"취학통지서가 나오면 보내야지요"
"계속 이 곳에서 사실 생각이신가보네요?"

경숙은 비로소 그 선생의 속내를 눈치챘다.
아이의 상태를 어디선가 들은 학교선생이 보람이를 부담스러워하는 것이었다.
가슴이 쿵쾅거리는 것을 억지로 억누르고 경숙은 잠자코 서 있었다.

"아시겠지만....시골학교는 다 이렇습니다. 안그래도 폐교가 되어서 읍내학교로 통합을 시키니 마니 얘기가 나오는데 입학생 하나 느는게 얼마나 고마운데요. 하지만 그것도 경우에 따라서는..."

선생은 말을 끊고 헛기침을 하더니

"휠체어를 쓴다고 해도 당장 올라가는 언덕배기부터 계단인데다가 화장실이고 교실이고 워낙에 다 구식이 되어놔서리 아이가 제대로 학습을 받을 환경이 될지도 의문이고 아이한테 맞을 교구도 없고...아무래도 교사들부터가 이런 일은 처음이라...."

그러니 학교에 입학시키지 말라는 소리였다.
경숙은 뜨거운 모래를 얼굴에 들이받은 기분이었다.

"아이는 제가 업고 다니면서 통학시킬수 있어요. 의자에 앉기만 하면 별 일 없을 거예요. 혼자서 책도 잘 보고 글도 얼마나 잘 읽는데요. 애가 순해서 다른 애들하고 말썽부릴 일도 없을텐데..."

"예 압니다. 어머니가 대단하시다는 건 얘기 들었습니다. 하지만 집에서 글 읽는 것과 학교에서 공동생활하면서 교육을 받는 것은 또 다르지요. 무엇보다 아동 중심으로 생각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장래를 위해서도 처지에 맞는 교육을 처음부터 시작하는게 낫지 않겠습니까"

경숙은 고개를 떨구었다.
시어머니에게서 아무리 모진 말을 들어도 꿈쩍않던 눈가가 흔들리더니 눈물이 툼벙 떨어졌다.
특수학교에 보내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은 했었다.
또래들이 많은 곳으로 넣어서 제 몸에 맞는 교육이 옳은가, 아니면 그래도 온전한 아이들 틈에서 고생시켜가며 일반 교육을 시키는 것이 아이의 장래를 위해서 더 나은가고 타는 속으로 내내 고심했다.

하지만 그것도 그나마 남편이 월급을 갖다주면서 가장노릇을 하던 때의 속 좋은 생각이었고, 당장 오갈데 없어 밥이나 굶지 않겠다 싶어서 시댁으로 기어들어온 지금으로선 그게 사치였다.

특수학교 교육비가 얼마나 되는지 짐작이 되지 않는 일이었고, 아니 당장 지금 어디에 가서 두 몸이 먹고 살 수 있을지 캄캄했다.
자기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으나 보람이를 앉은 채로 청맹과니를 만들수는 없는 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