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돌말사람들

민달팽이 -4

소금눈물 2011. 11. 21. 16:11

09/16/2004 10:13 am공개조회수 0 2




며칠전에 친정엄마가 다녀갔다.
그것도 시댁까지도 못오고 부여읍내에 와서 전화를 한 것이었다.

몇달 새 완연히 늙어버린 모습을 보고 경숙은 가슴이 내려앉았다.

"뭐 하러 왔어. 잘 지낸다니까"

미안하고 아픈 속과는 엇나가는 말로 퉁명스럽게 쏘아부쳤다.
죄지은 사람처럼 딸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도 못하고 연신 이마의 땀을 훔치며 낡은 양산 깃만 쥐었다 폈다 하는 걸 보니 부아가 치밀었다.

아무리 어렵다 곤하다 해도 살만큼 사는 집에서, 자기들은 에어콘 빵빵한 중형차 몰고 다니면서 노인네 양산하나 깔끔한 걸 못 사주고 저걸 아직도 끌고 다니나 싶어서 오빠 내외가 원망스럽기만 했다.

경숙이 대학에 들어간 해, 여름방학에 아르바이트를 해서 산 첫 선물이었다.
늦게 본 딸의 첫 월급 선물이라고 엄마는 아까워서 펴지도 못하고 몇 날을 기꺼워했었다.
곱던 저 양산이 저리 될 동안, 그 세월이 이렇게 자신을 망가뜨리고 엄마를 늙혔나 싶어 경숙은 속이 아렸다.

"잘..지내지?"

잘 지내지 못할 것을 뻔히 알지만, 달리 어찌 말 할 길을 찾지 못하고 엄마는 눈길을 피했다.

보람이 할머니가 얼마나 모질지는 첫인사 자리부터 알아본 터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자신의 앞으로 단돈 얼마짜리 통장도 없고, 배아파 낳은 아들이라 해도 늙어보니 더부살이가 되어버린 처지라 동생 앞으로 살 방도 좀 마련해주자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 그냥 사는 거지, 맘 맞고 의좋아서 평생 해로하는 부부가 어디 있대? 이혼도 능력있는 이나 하는거지 가진 건 쥐뿔도 없으면서 뭘로 풀칠을 하겠다고 이혼이야. 더구나 보람이 같은 애를 데리고 뭘 어쩌겠다고? 행여라도 당신, 동생 불쌍하다고 공연히 엄한 소리 하지 말아요. 지금 기분이야 쫓아가서 다리 하나라도 부러뜨리고 싶지.

다음엔 어쩔 건데? 그 집서 보람이 받아준대? 자기 식구 취급도 안하는데 행여라도 오냐 내새끼야 하겠다. 다 보람이 위해서야. 그나마 그런 아빠라도 호적에 있어야 불쌍하지 않게 되지. 당장 이혼해봐. 그애 목숨이나 부지할 거 같어?

당장 다음 달에 교실 하나 더 늘여야 해. 일미당 사거리에 입시학원 하나 또 들어온다는데 인테리어라도 새로 해야지 어쩔라고 그래? 요즘 애들이 얼마나 무서운데. 뭐 하나 좀 낫다 싶으면 영낙없이 우르르 몰려갈텐데 방도 있어?

그리고, 집안에 이혼한 사람 하나 있어봐. 그 집 꼴을 어찌 보겠어? 당신 어디 가서 애들 가르친다고 말이나 제대로 하겠어?"

보람이 애비 일 저질렀다는 말을 듣고 난리가 났던 때였다.
한번도 살가운 가장노릇 못보던 터에, 바깥 여자에 공금횡령으로 집까지 말아먹고 처자식을 길바닥에 내놓다니.
얼마나 더 험한 꼴을 보겠느냐고, 차라리 갈라서는게 낫지 않겠냐고 즤 남편이 소리지르는 걸 달랜답시고 며느리가 하는 말이었다.

밤잠도 못 자고 속이 타서 물그릇 찾아 나왔던 노인네는 그대로 귀를 닫고 싶었다.
한다리 건너 천리라고, 복보다는 혹일 시누였지만 시누 이혼하고 군식구 늘까봐 먼저 애가 닳은 것이었다.
몇 달만에 만난 딸은 기미가 까맣게 앉았다.
마음 편히 산 것은 아니나 험한 일도 해 보지는 않았던 막내딸 얼굴이 아주 망가졌다.
딸 신세를 생각하면, 아이를 고아원에 버리든 말든 그 집에다 던져주고 당장 목덜미를 잡고 끌고 오고 싶었지만 저게 내 새끼라 이리 피멍울이 맺히는데 저도 제 새끼때문에 그러리라 싶어서 친정엄마는 차마 그 말을 못했다.

"걱정마 엄마.. 괜찮어 다.."
"늬 오빠가 같이 온다는 걸 오지 말라고 내가 말렸다. 방학이니께 정신읎어, 바뻐서..."

내내 말없이 묵묵하던 모녀는 불쑥 말을 던지고 또 할 말을 잊었다.

에어콘을 켜지 않고 탈탈탈 낡은 선풍기가 돌아가는 다방 안은 찜통같았다.
서로가 죄 지은 이들처럼 고개를 돌리고 말을 못찾다가, 이윽고 친정엄마가 먼저 일어섰다.

"가 봐라..보람이 기다리겠다"
"응...."

다방문을 열고 나와서 머뭇거리던 엄마는 낡은 지갑을 꺼내 꼬깃꼬깃한 지폐 몇 장을 꺼내 딸의 손에 쥐어주었다.

"엄마 왜 이래! 나 돈 있어!"

" 있는 중 알어. 야 근디 내가 다 늙어서 돈을 엇다 쓰겄니. 갖고 있다가 보람이 아이스께끼라도 사줘. 외할미라고 얼굴도 못 보고 가서 미안하다야"

뿌리치는 딸을 한사코 밀쳐대며 황급히 종종걸음으로 멀어지는 것을, 경숙은 끝까지 보지 못했다.
도리는 다 하지만 잔 정은 없는 며느리를 얼마나 어려워하는지 경숙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행여라도 빈 말로 모셔다드리겠다 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갖고 있던 쌈짓돈 몇 푼 쥐어주자고 이 찌는 날에 여기까지 왔다가 도망치듯 가버리는 엄마의 등이 눈물에 어려 뿌옇게 떠올랐다.

그 돈을 보람이의 천식약으로 바꾸어오면서 경숙은 내내 울었다.
약국 앞의 농약사 간판이 내내 가슴에 박혀 떠나지를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