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돌말사람들

수상한 집 - 마지막회

소금눈물 2011. 11. 21. 15:58

05/12/2004 05:54 am공개조회수 0 14




"그러니까...지고말 꽃자리니까...너도 필요 이상으로 남에게 너를 기울이지 마."

은숙의 말은 먹물처럼 어둠속으로 번져들었다.

"왜 그렇게 항상 먼데.... 내가 손 뻗으면 안되요? 그럼 안되는 건가? "

은숙이 희미한 미소를 띄고 철만을 돌아보았다.
철만의 얼굴은 석고상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사랑이나 믿음 같은거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 속에 집 한채를 짓고 있는 것 같아. 근데 다들 생각하기엔 하늘까지 닿을 것 같은데 그거 일순간에 무너져버리는 신기루에 불과한지를 몰라. 별 거 아냐 철만아. 너무 크게 쌓으면 내려갈 길도 멀단다.
내가 나를 믿지 않는데 네가 나를 믿음 안되. 그럼 안되는 거란다.
나는 여기를 떠날 거고 너를 마음에 안고 가는 일도 없어. 그냥 우리가 잠깐 앉았다 가는 꽃자리인 거야..."

"그럼. 나는. 나는 장난이었나? 그런건가? 그럼 지서기는!!"

자기도 모르게 토해놓고 철만은 아차했다.
견딜수 없이 모멸감이 치솟았다.
던지고 나니 은숙이 정말로 미워졌다.

"무슨 말을 하길 바래니? 무슨 말이 너에게 더 아플까... 그걸 내가 고민해야 하니?"

얄밉도록 은숙의 얼굴은 맑았다.
어린 동생을 달래듯이 따뜻하고 심상한 목소리였다.

"누구나 여길 지겨워해. 도망치고 싶은데 갈 곳이 없어 묶여있는 것 같아. 일년이 가도 보는 사람들의 얼굴도 똑같고 찌든 손바닥도 똑같애. 다른 곳으로 가 봐도 소용없겠지. 헛된 희망을 품고 미친듯이 달려가는 세상도..거기도 마찬가질 거야. 그게 사람을 정말로 위로해줄까.

나는 햇볕에서 졸고 있는 망둥이처럼 꼭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애. 견딜수 없이 무료하고 지쳐...
네가 잠깐 동안의 바람은 아니었을 거야. 지서기도 그럴 걸.. 그냥...너희들은, 둘 다 내가 짓지 않는 집이야. 나는 내려갈 길이 겁나니까 그런 바보같은 일은 안해....그러니..."

철만의 얼굴은 무참해졌다.
은숙의 말이 불에 닿은듯 아프고 뜨거웠다.

'바보같은 생각 하지마. 네게 잔인한 소리가 될 줄 알지만, 다음부턴 나 같은 여자는 피해가는 거란다. 손을 뻗으면 그 손에 돌멩이를 얹어줘. 네 마음을 쉽게 던지지 말고."

"그럼 누나는 나한테 돌멩이를 준건가? 내가 그래도 될 만큼, 누나가 그래도 될 만큼 내가....그래도 되는..그래도 되는 사람이었던가?"

마지막 말은 터지는 오열에 묻혀 흩어졌다.
어깨를 어루만지는 은숙의 손길을 뿌리치고 꺽꺽 느껴우는 철만을, 은숙은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럼 안되는 거잖아... 누나가 나한테 그럼 안되는 거잖아...."

어쩌면 늦게 따라오는 사람들의 말은 왜 이렇게 다들 똑같은 걸까...
지서기의 한숨을 같이 떠올리며 은숙은 숨을 들이켰다.

그러게 말야..
상처받지 않으려면 마음을 안주는 건데, 약한 사람들은 지으면 안되는 건데 그런 사람들이 항상 가질 수 있는 것보다 번번히 더 높게 쌓고 말거든..결국 무너질걸....무너지면 더 참담해질걸....

정말로 떠나야겠구나.
여긴 이제 봄이 지쳐서 나른해지는데, 이제 여름인데 또 석양빛에 잠든 철만의 얼굴을 보게 될 것 같아.

은숙은 철만의 얼굴을 품 속으로 끌어들였다.
나를 네 안에 두지 말아라..오래 아프지 말아라.

눈물이 번진 얼굴을 감싸안으면서 정말 무너지고 있는 것은 철만이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형체를 갖기 시작한 어떤 것이었는지, 은숙은 그것도 알지 못했다.

늦은 봄 밤은 물돌에 젖어 흐르기 시작할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