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돌말사람들

석양에 홀로 서서 - 8

소금눈물 2011. 11. 17. 16:35

 

02/14/2004 11:18 pm공개조회수 0 6


나중에 생각해보아도 어찌된 영문인지 몰랐다.
아무리 돌아보아도 은숙의 말도, 입김도, 입술에 닿던 감촉도 기억이 나지 않고, 애꿎은 물소리와 뒷산에서 쩡쩡 울리던 밤새소리만 시리게 파고들 뿐이었다.
그때 뒤로 짚었던 손바닥에 닿던 풀잎의 보드랍고 서늘한 느낌이 지워진 입맞춤보다 선연했다.

혼절할듯 부들부들 떨고 있는 철만을 두고 은숙은 휭하니 일어나 터벅터벅 가 버렸다.
따라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풀밭에 털석 주저앉은 채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작것이, 지금 뭐하는 짓이다냐! 니가 지난 봄이 못헌 수릿재 모심기를 여기서 허냐? 총총허니 껴 늫으야지 니가 늫고 싶은 디다 숭덩숭덩 늫으먼 저 찌라시들은 워쩔껴~! 장수탕 광고는 니 목구멍이로 쳐질르고 다닐껴?"

보급소장이 소리를 질러도 자꾸 헛손질만 나가서 며칠을 착실하게 욕을 얻어먹었다.
그래도 정신은 허공에 둔 듯, 아니 안뜰말 수로에 처박았는지 장터 면사무소에 처박았는지 노여움도 없이, 서러움도 없이 휘적휘적 다녔다.

" 저 잡놈으거~! 니가 내 조카만 아니먼 수작골 버섯공장이루 보내서 두엄냄새라도 팍삭허니 시켜서 정신을 번쩍나게 헐 것인디!"

배달하려던 신문을 우르르 쏟아버리는 철만의 등 뒤에 대고 보급소장이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그런데.....그것이 끝이었다.
연락을 주고받고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하던 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래도 좀 달라야 하는 것 아닌가.
하염없이 넋을 놓고 있다가 지글지글 피어오르던 지열이 살짝 가시는 저녁나절만 되면 철만은 자동적으로 벽시계를 힐끗 거렸다.
여섯시...면사무소가 끝날 시간. 아니..옷을 갈아입고 여기를 지나자면 삼십분은 걸릴 것이다.
아니, 인사도 할 테고 동무들과 만날 일도 있을 것이다. 그럼 여섯시, 아니 일곱시...

안뜰말로 가자면 자기 말대로 여긴 어차피 거쳐야 하는 길목 아닌가.
가다가 들르기 무안하면 전화라도 해 주면 단박에 달려갈 것을.
속절없이 해가 저물고 아홉시 뉴스가 열리도록 철만은 들뜬 기대가 바람빠진 풍선처럼 허물어지는 것을 날마다 치러야 했다.

못참고 면사무소 앞까지 얼쩡거리고 갔다가 들어가지도 못하고 애꿎은 오토바이 소리만 부앙부앙 대다가 터덜터덜 돌아왔다.
바보...바보... 그러는 날은 거울 속의 자기 얼굴이 꼴도 보기 싫었고 애꿎은 밥투정을 하다가 밥상을 뺏기기도 했다.

아니었던가. 나 혼자만이었던가. 나 혼자 무엇을 시작하고 혼자 헤메는 건가.
은숙이 서운하고 미웠다가 다시 뼈가 저리게 아픈 그 무엇 때문에 갈팡질팡하면서도 철만은 찾아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지우지도 못하고 속이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