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조와 그의 아들 이산 정조.
장 조(莊祖)
후세인에게는 사도세자로 더 잘 알려진 장조는 1735년(영조 11년) 1월 21일에 창경궁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선, 자는 윤관(允寬)으로, 영조의 둘째 아들이고 어머니는 영빈 이씨(映嬪李氏)이다. 이복형인 효장세자(孝章世子, 추존황제 진종)가 요절하고 영조가 40세가 넘어서 태어났기 때문에 2세 때 왕세자로 책봉 되고 10세에 영의정(領議政) 홍봉한(洪鳳漢)의 딸과 혼인하여 별궁에 거처했다.
세자는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3세때 이미 부왕과 대신들 앞에서{효경(孝經)}을 외우고, 7세에{동몽선습(童蒙先習)}을 떼었다. 글씨를 좋아해서 수시로 문자를 쓰고 시를 지어서 대신들에게 나누어주었고, 10세에 벌써 정치에 대한 안목이 생겨 집권세력인 노론이 처결한 신임사화를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1794년 부왕을 대신하여 청정(廳政)에 임하게 되자, 그를 싫어하는 노론들과 이에 동조하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 숙의 문씨(淑儀文氏)등이 영조에게 무고를 했다.
함부로 궁녀를 죽이고, 여승을 입궁시키며, 한 나라의 서정(庶政)을 맡고서도 몰래 왕궁을 빠져 나와 평양을 내왕하는 등 난행과 광태를 일삼았다는 것이다.
영조가 이를 듣고 수시로 세자를 불러 크게 꾸짖으니 마침내 비정상적인 정신질환을 앓게 되었다. 부자간의 대립관계가 표면화된 것은 영조가 병석에 있을 때 신하들이 세자에게 약을 부왕에게 권할 것을 종용했으나 거절하므로 영조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세자를 보좌하던 소론의 영수 이종성(李宗城)이 탄핵을 받아 조정에서 물러나게 된 때부터라고 한다. 1761년, 세자가 임금 모르게 관서지방을 유람·순행하고 돌아왔다. 그러자 윤재겸(尹在謙)등이 상소하여 세자의 체통에서 벗어났다고 주장하고, 영조는 세자의 관서순행에 관여한자들을 모두 파직시켰다. 다음해 5월, 영조의 계비 김씨(정순왕후)의 아버지인 김한구(金漢耉)와 그 일파인 홍계희(洪啓禧), 윤급(尹汲)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羅景彦)이 세자의 실덕(失德)과 비행을 고발하는 상소를 올려 무고하는 사건이 있고, 문소의가 부자간의 이간책을 쓰자, 격분한 영조는 세자를 불러 자결을 명했다. 영조는 세자가 끝내 자결을 하지 않자 그를 서인으로 폐하고, 세자와 영빈 이씨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뒤주에 가두어 8일 만인 5월 21일에 죽게 했다.
세자의 춘추 28세 때의 일이었다.
영조가 뒤에 세자의 일을 후회했지만, 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비극적인 사건의 계기가 된 부자간의 불신과 이간은 노·소론의 당쟁에서 비롯되었고, 남인·소론 등이 부왕 영조와 정치적인 견해를 달리하는 세자를 앞세워 보수적인 노론정권의 전복을 도모하다가 실패한 사건이라고 논하는 사가(史家)들도 많다.
사도세자는 정조 즉위년(1776년) 3월에 존호가 장헌(莊獻)이라고 추상되었고, 수은묘도 영우원(永祐園)으로 바뀌었다. 영우원은 1789년(정조 13년)에 현재의 위치로 천장되어 다시 현륭원(顯隆園)으로 원호가 바뀌었다가 1899년(광무 3년)에 장조의 묘호(廟號)인 융릉(隆陵)으로 올렸다. 사도세자는 1899년 12월 19일 묘호가 장종에서 장조(莊祖)로 다시 바뀌고, 제호(帝號)를 써서 의황제(懿皇帝)로 추존되었다.
정 조(正祖)
정조는 1752년(영조 28년) 9월 22일 영조의 둘째 아들인 장헌세자(일명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산,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이다. 1759년에 세손에 책봉되고, 아버지 사도세자가 비극적인 죽음을 당하자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뒤에 진종으로 추존)의 후사(後嗣)가 되었으며, 영조가 승하하자 1776년에 왕위에 올랐다.
세손 시절인 1775년부터 대리청정을 하다가 다음해에 2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는데 생부인 사도세자가 당쟁에 희생되었듯이 정조또한 세손 시절에 갖은 위험속에서 홍국영(洪國榮)등의 도움으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
즉위 후 보기 드문 호학(好學)의 군주로, 퇴색해버린 홍문관을 대신하여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여 문화정치를 표방하며 기성의 인재를 모으고 참신한 인재를 양성했다. '우문지치(右文之治)'와 '작성지화(作成之化)'를 규장각의 2대 명분으로 내세워 한편으로는 기성의 인재를 모아들일 뿐만 아니라 참상(參上)· 참외(參外)의 연소한 문신들을 교육하여 국가의 동량으로 키우고, 자신의 친위 세력으로 확보하고자 했으며 세손 때부터 추진한 {사고전서}(四庫全書)의 수입에 노력하며 서적의 간행에도 힘을 기울여 새로운 활자를 개발했다. 임진자(壬辰字)·정유자(丁酉字)·한구자(韓構字)·생생자(生生字)·정리자(整理字)·춘추관자(春秋館字) 등이 그것이다. 게다가 왕조 초기에 제정, 정비된 문물제도의 보완·정리를 위하여 영조 때부터 시작된 정비작업을 계승, 완결했다.
{속오례의}(續五禮儀)·{증보동국문헌비고}(增補東國文獻備考)·{대전통편}(大典通編)등을 편찬하고 자신의 저작물도 정리하여 뒷날 {홍재전서}(弘齋全書)로 정리·간행하게 했다.
정조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하여 당쟁에 극도의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왕권을 강화하고 체제를 정비하기 위하여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시행했다. 1788년 정조 12년부터 그간의 양척신당에 비판을 가해온 청류를 끌어들여 준론탕평정책(峻論蕩平政策)을 취했다. 기존의 노론 우위의 정국에 변화를 일으켜 왕권을 강화하려 한 것이다. 정조는 남인에 뿌리를 둔 실학파와 노론에 기반을 둔 북학파 등 제학파의 장점을 수용하고 그 학풍을 특색있게 장려했다.
정조는 학문적으로 남인학파와 친밀했고, 그의 학자적 소양으로 인해 노론 중 진보적인 젊은 자제들이 형성시키고 있던 북학사상에도 관심을 기울여 북학파의 종장(宗匠)인 박지원의 제자들을 규장각의 검서관에 등용했고 이들이 주장하던 서얼통청운동(庶蘖通淸運動)에 부응했다. 또한 당시 중국을 통해 전래되어 정치문제로 되고 있던 서학(西學)에 대하여 정학(正學)의 진흥만이 서학의 만연을 막는 길이라는 원칙 아래 유연하게 대처했다.
문화의 저변확산을 꾀하여 중인 이하 계층의 위항문학(委巷文學)도 적극 지원 했다. 이 밖에도 {일성록(日省錄)}의 편수,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편찬, 장용영(壯勇營)의 설치, 형정(刑政)의 개혁, 궁차징세법(宮差徵稅法)의 폐지, 노비추쇄법(奴婢推刷法)의 폐지, 천세력(千歲曆)의 제정 및 보급, 통공정책(通共政策)의 실시 등 많은 치적을 남겨놓았다. 정조는 당쟁의 희생물로 비극적인 죽음을 당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온갖 정성을 다해 조영하고, 수원에 성까지 새로이 수축하여 유수경(留守京)으로 승격시키기도 했다. 정조의 재위기간 동안은 그의 학자적 소양에서 기인하는 문화정책의 추진과 선진문화인 건륭문화의 수입이 자극제가 되어 조선시대 후기의 문예부흥기를 이루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정조는 1800년 6월 28일 보령 49세로 승하했다.
처음에는 그의 유언대로 융릉 동쪽의 두 번째 언덕에 안장되었다가 이후 풍수지리상 좋지 않으므로 길지를 찾아 천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어 여러 길지를 물색하던중, 정조의 비 효의왕후 김씨가 승하하자 순조 21년인 1821년 현 위치인 현륭원 서쪽 언덕에 이장하여 효의왕후와 합장해서 오늘날의 건릉이 되었다. 시호는 문성무열성인 장효왕(文成武烈聖仁莊孝王)이다. 순조 즉위년인 1800년에 묘호를 정종(正宗)으로 했다가 1899년(광무 3년) 12월 19일에 다시 묘호가 정조(正祖)로 바뀌고, 대한제국이 성립되자 황제로 추존되어 선황제(宣皇帝)가 되었다.
08/27/2007 0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