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돌말사람들
그 사람 박봉찬 전 13
소금눈물
2011. 11. 17. 15:22
며칠을 아침저녁 문안처럼 호봉엄마의 큰 소리가 나고, 마주한 인사처럼 또 무엇 무엇이 날아다니고 그러더니 이내 아랫집은 조용해졌다.
"내가 전생이 박봉챈이헌티 무신 죄럴 지어서 이 생에서 다 갚니라구 이러까나. 저 니는 내 발 밑이서 뭔 돌멩이럴 치우구 다니다 손톱이 다 빠져서 내가 이 죄럴 갚구 사까"
우물가에서 엄마에게 한탄하던 호봉 엄마의 넋두리였다.
장터에 내가는 소쿠리에 힘빠진 배추 몇 포기가 얹혀 있었다.
하긴 남이 말한다고 고분고분 받을 줏대없는 사람이 아니었고 어차피 자신의 이름자가 박힌 문서를, 빚문서 말고는 챙길 일이 없는 이였다.
"시절이 수상허여 사나이 품은 뜻을 시상이 알어주지 않으니 그것이 내 탓인가, 나럴 속이는 시상 탓인가"
누렁이 아침에 먹을 꼴을 베어 오던 아버지가 박봉찬씨와 마주쳐 싫은 인사를 했더니 건너왔다는 대답이었다.
"옘병, 풍신 쥐어발른다"
그러고는 아버지는 입을 닫고 말았다.
"그려 봉찬아. 사램이 한 번 가진 뜻언 중도에 관두는 것이 아니다. 니가 말어먹을 것이 인저는 니 집 안방 장판벢이는 남은 것이 읎다 혀도 사내가 되야서 너만큼만 살어보먼 원도 읎겄다. 남 못허는 일, 끝이나 장허게 구경허자"
그럴 줄 알았다는 바깥 이들 한심한 시선 속에다 정선생의 비아냥만 한자락 더 얹혔을 뿐이었다.
한동안 박봉찬씨의 얼굴은 마을에서 뜸해졌다.
아침마다 말끔한 흰 셔츠에 풀기 밴 빳빳한 바지, 백구두까지 닦아 신고 마을 안길을 오가던 봉찬씨의 모습대신 여물 뺏긴 늙은 소처럼 푸푸거리며 돌아다니는 정선생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사람이 태 나서 가야 헐 길이 있구, 가지 말어야할 길이 있구, 또 가다가두 말어야 헐 길이 있다.
가야 허는 길언 무신 고난이 있다구 혀두 오지게 먹구 일생얼 정진 혀서 죽을 띠 그 답얼 들을 일이구,
가지 말어야 헐 길이라문.... 박호봉이 너 이완용이 아냐?"
"......"
호봉이 콧물을 훌쩍 들이켰다. 한여름 삼복만 아니라면 늘 달고 다니는 일이었다.
"그려, 니가 뭘 알긋냐. 알기넌 산동리 과수원 감 떨어지는 자리나 알 일이지.
에, 조선을 이등 박문이헌티 팔어먹은 매국노여 그렁게. 그런 넘은 일찌감치 돌아가셨으야 저한티 좋구 후손이 욕얼 안 먹구, 나라가 보존될 일이었다.
또 하나, 가다가 말으야 헐 일이라문 짐유신 장군이가....."
하더니 헛기침을 킁 하고는
"그렁게 니덜은 우찌혔든 간이 갈 디, 말 디, 품얼 뜻, 버릴 길얼 늘 가슴에 품고 새겨야 헐 것이다. 알긋냐?"
"에"
정선생의 인생강독은 더 길어졌고, 한동안 호봉이는 정선생의 구박을 착실히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