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묘지
아르놀트 뵈클린의 <망자의 섬>
떡갈나무 숲의 수도원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야코프 반 로이스달 <유대인 공동묘지>
죽음을 보는 세 가지 시선.
닮은 듯 하나 조금씩 다르다.
뵈클린의 무덤이 도저한 허무와 침묵의 죽음이라면 (스틱스를 건너는 뱃사공 카론의 노 소리 조차 들리지 않을 것 같은 완벽한 고요..)
프리드리히의 죽음은 침묵속의 경건함, 인간도 종교도 모두 허물어진 뒤의 침묵 같은 고요라고 할까.
허물어져 폐허가 된 수도원의 그림자 뒤로 천천히 밝아오는 여명 (혹은 저녁그림자일까)은 죽음의 이미지가 된 수도원 건물을 더 도드라져 보이게 한다.
이 작가의 다른 그림이 압도적으로 다가오는 자연의 풍경을 통해 신의 섭리를 바라보며 침묵하던 인간들의 모습이 많았던 것을 생각하면 그의 독실한 신앙관이 어쩌면 도저한 허무주의로 닿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로이스달의 묘지는 좀 다르다.
꺾인 나뭇가지, 죽어가는 나무 둥치, 여기저기 흩어진 무덤과 깨어진 석관의 잔해들, 묘지를 지키는 예배당조차 이제는 찾는 이가 없어 버려졌다.
죽음의 이미지가 이렇게 많은데도 위의 두 그림보다는 훨씬 감상자가 편안하다.
먼저의 그림들에 관람자의 공포를 감출 수가 없었는데 로이스달의 묘지는 아닌 이유는 뭘까.
부러지고 죽어가는 나뭇가지에 환하게 쏟아지는 햇살과 밝은 구름, 거기다 계곡 저 편으로 떠오른 무지개를 보라.
무지개는 희망을 상징하지 않는가?
죽음과 희망이라니, 이 모순된 상징의 병치.
두 그림이, 현실적으로 내가 직접 맞닿을 일이 없는 어떤 세계를 그렸다면, 로이스달의 묘지는 숲속길을 잘못 들었다가 만나는 버려진 묘지의 생생한 현실감이 느껴져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생존연대는, 로이스달- 프리디리히- 뵈클린 순이다.
시대를 넘어갈 수록 점점 더 숭고한 신앙관에서 존재했던 죽음과 멀어져 인간 본연의 죽음, 우주의 멸망까지 이어가는 존재의 부정...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오바하는 것일까.
내게는 뵈클린의 죽음이 훨씬 더 매력적이면서 그래서 더 무섭고 똑바로 바라볼 수 조차 없이 두렵다.
물에 대한 공포를 갖고 있는 내가, 그 밑바닥도 알 수 없는, 짐승의 등처럼 천천히 울컥울컥 흐르는 캄캄한 물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기분이랄까.
두려워서 도저히 똑바로 직시할 수 없는, 그렇지만 그래서 더더욱 시선을 돌릴 수 없는 죽음에의 강력한 유혹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