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암사- 수마노탑 가는 길.
정암사- 수마노탑 가는 길.

정암사...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창건한 절로 월정사의 말사입니다.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이라 하나 우리들 다모폐인들에겐 도련님의 추억으로 남은 곳.


몇 번을 드나들었는지 이젠 눈 감고도 떠오르는 정암사.
계곡물은 흐르다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고추바람이 살을 에어도 마음은 들떠서 정신없이 절 뒷산으로 달려갑니다.
돌계단!!
아아 그 계단...

이렇게 다시 찾아왔습니다.
수월대사의 천거로 서얼신분임에도 한성 좌포도청으로 들어갑니다.
아버지의 기대와 어머니의 한, 그리고 당신 자신의 야망이 그 길을 보여주는 출사.
하지만 재희를 이 깊고 깊은 산중 암자에 혼자 두고 떠나는 발걸음이 어찌 가벼웠을까요.
도련님의 수발비종이긴 하나 그 아버지 장일순영감을 존경했던 황보철 현감의 속깊은 배려였음을 도련님도 압니다.
이제 자신이 떠나면 재희는 관아로 돌아가 관비로 돌아가겠지요.
얼마나 고단하고 캄캄한 날이 될까요.
그렇게 무겁게 떠나간 길...

떠나는 도련님을 기둥 뒤에 서서 몰래 지켜보며 눈물을 삼키던 재희.
그 눈길이 떠오릅니다.

이 좁은 산길을 조금만 올라가면 수마노탑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담고 있어 정암사는 따로 불상을 안치하지 않는 적멸보궁이지요.

탑의 형식은 우리나라에선 흔치는 않은 전탑형식입니다.
사실 탑 자체는 그다지 썩 아름답다거나 하는 건 저는 잘 느끼지 못하겠습니다.
뭐니뭐니 해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탑은 정림사지 오층석탑임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

어느덧 천천히 땅거미가 내리는 겨울 저녁.

군데군데 남은 잔설이 녹지 않은 가운데, 상록수만 홀로 푸르릅니다.
이 맹렬한 추위에도 제 빛을 잃지 않고 청청한 기상.
雨後龍孫長 우후용손장 비 온 뒤 대나무 쑥쑥 자라고
風前鳳尾搖 풍전봉미악 바람 부니 대나무 산들거리네
心虛根底固 심허근저고 속 비었고 뿌리 굳으니
指日定干宵 지일정간소 이제 곧 하늘까지 닿으리라
그사람 생각이 납니다..
수마노탑에서 내려다본 정암사.
이렇게 보니 가늘게 보이지만 소나무 둥치의 두께가 만만치 않습니다.
시원스런 직선으로 쭈욱 뻗어올라간 기상이 멋집니다.
태백산 홍송을 키워 나라의 중요건물이나 궁궐을 세우고 보수할때 썼는데 문득 불타버린 숭례문이 생각납니다.
참으로 미친 세월입니다.
어쩌면 무슨 슬픈 예화(預禍)의 앞얼굴 같은 끔찍한 변란이었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도 어제 새벽 벌어진 용산 참사에 가슴이 답답하기만 합니다.
그 시작이 오늘은 이렇게 나타다고 내일은, 그 다음에는 또 어떤 일로 우리를 절망케 할까요.
산촌(山村)에 밤이 드니 먼딋 개 즈져온다
시비(柴扉)를 열고 보니 하늘이 챠고 달이로다.
뎌 개야 공산(空山) 잠든 달을 즈져 므삼하리오.
(천금)
무심한 것은 세월이라 하나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이에게는 세월은 무심하지 않습니다.
마음에 남아 고여 꺼지지 않는 불꽃이 되고 그 불꽃은 언제나 당신을 그리워하는 꽃으로 다시 필테니까요.
당신이 없는 날의 그녀를 그리 걱정하듯, 그녀 없는 날의 당신도 막막했겠지요.
그렇게 떠나간 먼 길.
도련님.
그리고 우리도 남았소.
우리도 이 돌계단에서 당신을 보내며 언제든 다시 오실 것을 믿으며 기다리오.
저 굳은 얼음장 아래로 잠든 어린 물고기들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여, 흐르지 않는다 하여 이 마음 사라진 것이 아니듯
봄이 오고 저 물소리 이 시내에 다시 굽이쳐 흐를 때, 우리도 언제나처럼 다시 깨어나 당신들의 폐인으로 함께할 것을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