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그녀는 다모폐인
운당 - 남양주 종합촬영소에서.
소금눈물
2011. 11. 16. 20:48
운당 - 남양주 종합촬영소에서.

대충 영상관을 돌아보고 바로 야외세트로 올라갔소.
저 곳...상당히 익숙하지 않소?
옥이의 사주전 보따리를 나꿔채고 담박질하던 축지네 장터거리.
답사를 다니면서 용인일까 아니면 낙안읍성 저자거리일까 한참 생각했었다오.
용인이라면 저렇게 반듯한 골목이 없었던 것 같고 낙안읍성이라면 보따리를 나꿔채는 그 한장면을 위해서 옥이랑 축지내외랑 그 많은 시장꾼들까지 몽땅 데리고 그 아랫동네까지 간다는 건 너무 비효율이지 않겠소?
안내하시는 분이 사극의 장거리는 다 저기에서 찍는다더니 아마도 여기에서 촬영하지 않았을까 싶소.
역시 캡쳐확인이 필수요.
내내 기웃거리다 우리 나으리 장면과 겹치는 곳은 없는 듯하여 포기하고 운당으로 올라갔소.
운당은 저자거리 세트에서 십 분 정도 걸어올라가는 언덕 꼭대기에 있소.
조금 숨이 차는 높이라 해도 산책삼아서 걷기에 딱 좋으니 혹시라도 여기 들를 일이 있다면 절대 운당을 포기하지 마시고 꼭 들르시길 권하고 싶소.
사실 다른 촬영장이나 세트야 지나가도 그만이지만 말이오.

여기라오.
단정하고 고르게 뻗은 담장의 가로선들 위해 살짝 얹힌 뒤 산의 능선들.
기대가 되오 ^^

운당에 대한 정보가 궁금하실 분들을 위해 안내판을 아예 찍어왔소.



아..정말 아름답지 않소?
어둠이 설핏 내리는 저녁무렵이라 꼼꼼하게 그 모양을 다 보일 수 없으니 안타깝소.
우리 건축에 대한 아무 지식도 없고 도대체가 청맹과니인 이사람의 눈에도 찬탄이 절로 나오오.
산그림자를 따라 층층 적당히 낮아지는 담장선들, 결 하나 흐트러짐 없는 지붕골이 엄격하거나 딱딱하지 않고 바로 흐르듯이 이어지는 처마의 선과 함께 정결하되 굳지 않고 부드럽되 유난스럽지 않은 딱 그만큼의 족함.
흘러 넘치지 않고 모자라서 부족치 않은 성정.
자존심이 자만에 이르지 않은 조선 사대부가의 아름다운 자부가 고대로 느껴지오.


멀리서 보면 우리 저고리선도련의 부드러운 유선처럼 보이는 지붕선들이, 가까이 가서 보면 모두 각자의 직선이라오.
하나씩 가진 곧은 성품들이 모여서는 직선을 이루는 저 부드러움.
산그늘 위로 살짝 치켜솟는 지붕 끝이 이 집을 만든 장인이나 저 아름다움을 품고 살았을 가문의 기품을 드러내는 구려.
담장만 해도 그렇소.
평민들의 담장이 발뒤꿈치 살짝 들면 마당 안 살림이 그대로 보이는 어깨선 높이의 정겨움이라면, 사대부가의 담장은 드높고 단단하지요.
그런데 그 담장은 안에서 보기에 그럴 뿐 첩첩히 대문 중문을 거쳐서 맨 안쪽의 내당까지 이르다보면 살짝 살짝 머리에서 이마높이까지 다시 콧등 언저리까지 조금씩 내려닫히는 은밀한 열림.
과연...


으리대단한 집이라 입구부터 출입자 확인하고 출출이 cctv와 최첨단 개폐장치를 다 거치고도 문 하나 열면 고작 그 집안의 살림과 품격이 적나라하게 한눈에 보이는 지금의 집들에 비해서
조금씩 안쪽 살을 열어주면서 직격의 시야를 피해 살짝 가리는 저 시선의 여유.
드나드는 사람의 어깨에 걸쳐지는 산빛과 더불어 이 낙낙한 눈의 평화로움을 어찌 다른 말로 부를 재주가 없으니 말이 짧고 눈이 부족한 이의 안타까움을 어찌 다 헤이리오.



저물어가는 저녁빛이 어느새 운당의 지붕까지 내려앉으오.
안타깝소.
한낮의 청명한 하늘빛이 둘렀다면 얼마나 맑고 청명했을 것이랴..
우리 나으리의 그 보라색 두루마기와 소맷부리에서 살짝 드러나는 비단의 질감이 저 마루와 지붕골에서 느꼈다면 소인의 과함이오?
치맛자락을 살짝 치켜든 고운 내당마님의 버선코가 조용조용 건너는 모습이 눈앞을 스쳐가오.
한여름 장마비가 지나가는 오후에 이렇게 아름다운 사랑에서 책을 읽으며 문득 창을 열고 내다보는 모습.. 상상만 해도 황홀하지 않소?
인적이 끊어진 고적한 오후, 지붕골마다 타고내린 비가 낙수를 이루며 흘러가는 저녁...
단원의 말년그림이 스쳐가오.
만추는 또 어떠리오.
가을바람이 뜨락을 지나가는 저녁 창을 울리는 바람소리에 촛불은 자꾸 흔들릴 때, 나무잎은 뜰에 쌓이고 가슴에는 그 잎이 자꾸만 물이 들어가는 저녁나절...
겨울이라 무심할까요.
흰 눈이 소복소복 쌓인 저 뜨락에 그림자 하나 없이 온 세상 고요한 그 적막감.. 그 따뜻한 평화.
담장지붕에 날리는 흰 눈들... 어쩌자고 눈은 자꾸 쌓이고, 쌓이고...
생각만 해도 눈물겨운 풍경들 아니오?

보시오.
직선으로 돌아가던 지붕골 끝이 어떻게 살짝 휘어져 나오는지..
기가 막히오.
저 유려한 선들... 조선백자의 흐르듯 미끄러지는 선들, 부석사 무량수전의 배흘림 기둥들.
조선의 선(線)이겠지요.


운당 뒤 담장밑에 흐드러지게 핀 쑥부쟁이와 과꽃이라오.
시야를 턱 막는 담장의 딱딱함이 요 좁은 화단의 꽃들로 살짝 숙어지오.
면과 면을 나누어 분할한 중에도 빈 공간에 적당히 들어가는 숨들이 아름답소.



내려오는 언덕길조차 단정하기 이를 데 없으니, 푸새를 곱게 새로 들인 옷이 사각사각 소리를 내는 것 같소.

한껏 그 정경들을 품고 내려오다 다시 마주친 저자세트 중의 어떤 집 뒷모습.
아(亞)자형의 문짝과 받치고 있는 문턱이 참 야무지오.
아귀가 맞는 도형들의 모습은 참 곱지요...
우리의 집, 우리의 선들에 한껏 부풀고 겹던 발걸음이...어허~!!! 이게 뭔~!!

요즘 한창 상영중이라는 무슨 퓨전사극의 세트가 마침 거기에 있었소.
도대체가 아무리 영화세트라 해도, 내러티브를 포기하고 극적인 영상미로 밀고갔다는 그 영화.
어찌 이 모양이오.
아무리 한번 쓰고 말 품이었다 해도, 도무지가 한옥의 그 유려한 선들은 다 어디갔소?
바로 위의 사극세트와도 도무지가 어이없게 틀어지는 저 빙충맞음.
참고로 바로 위의 세트는 영화 <취화선>의 장소로 쓰였다오.
한번 비교해보시오.
아무리 세트라 해도 나름의 선을 살린 취화선 가옥들에 비해 바로 아래의 집.
최소한의 도리도 없소.
천박하고 부박하기가 이를데 없구랴.
지붕과 집 몸체의 뒤퉁맞은 비례도 그러하거니와 훅 불면 날아갈 듯한, 그야말로 대충 얹어놓은 뚜껑꼬라지를 한 지붕에 기가 막힐 뿐이오.
지금까지 소인의 눈을 흥겹게 하고 마음을 부풀게 한 그 선들은 다 어디갔소?
중국의 건물 선은 웅장하고 단단하나 여유가 없어 부드럽지 못하고, 일본의 선은 날렵하고 화려하나 끝을 지나치게 날림으로 품격을 잃는데 그 중간에서 여유와 엄숙함을 함께 갖춘 선이 한국의 건축미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소.
허나, 저 모양새의 집들은 도대체 어디서든 보도듣도 못한 모양새구려.

경박하기 그지없는 품새.
지어놓은 집은 그 집에 사는 사람의 정서까지 드러내는 모양이라 쇠못하나 함부로 박지 않고 나무살을 밀어서 숨결을 살린다던 대목장의 자긍을 들었소.
감히 대목장의 혼을 기대하지는 않소.
허나 그 탐미주의자로 소문난 감독이 무슨 심사로 저 꼬라지의 집을 지어서 한국의 문화라고 내돌릴 생각을 하니 분통이 터지오.
지은 집은 사람의 품성이나 모양새를 감추지 못한는 것이 우리 건축의 특징이 아니었나 하오.
꼼꼼히 감추고 덮은 것만 같은 우리 옷 품새라도, 희고 고운 목선을 받치는 저고리 동정에서 감추었다가 슬쩍 보이는 살빛의 아름다움을 보이고, 서양복색의 레이스같은 요란한 장식이 없이도 호선을 그리며 흐르는 저고리 선과 연연한 빛깔로만으로도 충분히 깊이있는 아름다움을 뽐내었던 우리복장.
웅장하게 솟은 성채가 아니라, 산그늘과 바람까지 품에 안아 그 바람과 계절의 움직임을 마루에서 마당으로 흐르게 하고 거기에서 정을 길어올렸던 한국의 아름다움...
도대체 아름다움의 극한을 보이겠다고 자랑해마지않던 그 영화.
저 마당에서 어떤 빛줄기를 보이자는 심사였는지, 영화를 보지 않고도 마음문이 턱 닫히오.
취화선을 보면서 미쳐 몰랐던 우리 것의 아름다움에 황홀해서 새삼 감독에게 감사하던 생각이 나서 더 씁쓸하오.
모르는 바깥사람들에게야 중국이든 한국이든 뭉뜽그려 "동양적"으로 보일 그럴싸한 모양일지 몰라도
적어도 "우리 것"은 아니었소.
저걸 우리 것이라 내세우고 다닐 것이라 생각하니 새삼 울분이 더 하오.
화려해야만 아름다움이 아니고 무거워야만 기품이 아니라오.
운당의 지붕선에 흠뻑 빠졌던 마음이 여지없이 무너지면서 조상이 보여준 은은한 기품을 저 따위로 내걸고 다닐 후손으로 가슴이 터지게 아팠소.
소인이 워낙에 과문하여 무지가 자랑인줄 알고 다니는 위인이기에 혹시라도 과하고 넘침이 눈쌀찌푸리게 하였더라도 용서하시오.
미쳐 못 본 것은 다른 분이 풀어주시길 바라며 저 아름다움을 다만 지나간 날들의 한때의 영화가 되지 않게 우리가 간직하고 빛낼 수 있기를 그저 바람이었으니...
저녁그림자가 자꾸 길어지오.
새로 풀먹인 치마끝이 움펑 도랑물에 빠진 듯하여, 기껍고도 답답한 그 심사를 어찌하지 못하고 돌아왔소.
권하거니와.... 혹시라도 가시려거든 사위를 살펴서 잘 보고 좋은 마음을 간직하고 오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