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껴간 사랑
옥이가 총탄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고육지계의 비책(秘策)이었다 하나 달포의 시간을 유예받고 벌인 일을 이제 종사관 직위마저 파직당하고 이 일에서 아무 힘도 쓸 수가 없습니다.
그새 산채로 잠입한 옥이에게 어떤 위험이 닥칠 지 내내 불안한 나날이었는데.... 혼몽한 꿈 속에서 끔찍한 옥이의 모습을 보고 말았습니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요.
옥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고 만 걸까요.
난희아씨가 오셨군요.
나으리를 찾았다가 그만 의식을 잃고 앓고 계시는 나으리를 보았습니다.
남녀의 구별이 엄연한데 몸종도 아니 딸리시다니... 하지만 아씨는 아랑곳하지 않으십니다.
처음 포청에 아버님과 그 분이 왔을 때 난희아씨의 마음이 그렇게 열렸었을 것입니다.
세자빈 간택때 지엄한 궁의 어른들 앞에서도 조금도 흔들림도 두려움도 없던 저 당당하고 슬기로운 처자가 그 기품에 서린 냉정함과 조신함을 처음으로 허물었던 사람.
반상과 집안의 지위, 그런 거리낌 따위야 하늘이 주신 인연으로 알고 거침없이 밀어젖히던 당찬 이...
압니다.
저 분의 마음은 얼어 있습니다.
아무리 어여쁘고 귀한 여인네라도 저 사람의 마음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그 보잘 것 없고 비천한 관비 말고는...
그녀를 질투했던가요.
그랬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곳곳한 품위를 가지고 아무리 너그럽게 그의 마음과 그녀의 숨은 사랑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사모하는 마음을 마음에 품고 어찌 자신에게 한줄기 빛도 허락치 않는 그 사람의 인연을 괴로와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도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서 그녀를 괴롭힌 기억은 없습니다.
사랑의 저울에서 그녀와 자신은 그저 한 사람을 사랑하고 바라보는 사람들일 뿐이었습니다.
그녀가 목숨을 내던지며 그의 앞길을 열어주는 것으로 사랑을 보일 때, 그 길 조차 가능하지 않은 이 귀한 신분의 여인은..밤을 줄여 그의 옷을 짓고, 외면당하고, 다시 바라보고, 간원하는 것으로 대신 하는 수 밖에 없었군요.
- 이..약도.... 버리리까....
이 약도 버리리까....
다모 본방 때, 폐인들의 미움을 많이 받았었지요 난희아씨.
가엾은 옥이가, 그 뜨겁고 애달픈 사모를, 나으리를 위해 번번히 사지로 뛰어드는 모험으로 증거할 때, 그 기막힌 사랑을 "사랑"한다는 말로도 차마 못하고 그 삶을 지켜내는 종사관의 사랑 앞에서-
난희아씨는 그 당당함을 오만으로 오해받았고, 그녀의 사랑을 집착으로 보이게 했습니다.
하지만...사랑의 전장에서 누가 자신의 잔보다 다른 누구의 것이 더 절실할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랑이 비록, 지금은 받아들여지지 못한다 해도, 끝까지 아니 될 것이라고는 말하지 못하는데. 그렇게 이 서럽고 고통스러운 사모를 접지 못하는데.. 누가 그녀를 탓할 수 있겠습니까.
압니다.
그가 자신을 진정으로 돌아보고 웃어줄 날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자신의 마음은 영영 저 사람의 강기슭에 닿지 못하고 그저 비껴갈 수도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건 나중에요, 나중에요 나으리.
이 약도...당신이 내 마음을 보지도 않듯이 그렇게 버리리까....
여인으로서의 부끄러움도, 가문의 위엄도 버리고 그저 당신 한 사람의 안위를 이렇게 걱정하는 내 마음을 당신이 다만 귀찮고 피곤하게 그렇게 밀어버리듯이..
그렇게 버리실 지라도..
당신이 상하는 것은 볼 수가 없는 이 미욱한 마음을..어찌하지 못하겠습니다.
당신이 버려두고 간 이 텅 빈 방의 무서움,
차라리 엄동설한에 맨 몸으로 나설 지언정 그 아이가 아닌 이 손으로 지은 옷은 쳐다도 보지 않으실 냉정한 마음을...
- 텅 빈 방, 젖어드는 마음을 아씨는 어찌하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