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 없는 이의 군적(軍籍)을 정리하다...
오늘은 쪽달이 떴다.
흐린 촛불을 끌어 일년을 미루어둔 군적을 정리하다 먹물을 찍은 붓을 차마 긋지 못하고 덮어버린다.
오늘 나는 끝내 그 이름 하나를 그예 지우지 못했다.
누구나 그를 목울대 아프게 떠올리면서도 아무도 그 이름을 말하지 않는 이.
살아서 청청(靑淸)한 무장이었고, 죽어서 우리의 아픈 침묵이 된 사람.
그리운 이름들은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된다는데
너와 그 사람의 별빛은 저 캄캄한 나라의 어느 언덕쯤에서 비치고 있는 것이냐.
귀밑 솜털이 곱던 네가, 박꽃처럼 하얀 미소를 갖고 좌포청에 오던 날이 생각난다.
말수가 적은 젊은 종사관의 한발짝 뒤에서 부끄러운 듯 미소를 짓고 있던 아이.
푸른 무명저고리 위로 분결같은 얼굴이 고왔다.
웃음이 곱고 마음이 따뜻하던 그 아이가 쥐었던 칼 한자루.
바람을 베고 비를 자르던 그 칼날이 어찌 그리 서늘하던지......
너의 이야기를 ... 그렇게 보내놓고야 들었다.
그랬구나... 그래서 그 사람은 네가 움직일 때마다 그렇게 잠을 못 이루며 네 모습을 지켜보았던 것이구나. 무자비한 피바람에 꺾인 가계가 다시 너를 다칠까봐 너의 몸짓, 눈짓에 그처럼 힘겨워하고 아파했던 것이구나.. 형제처럼 함께 움직이고, 비전하는 검세를 나누어주던 혈육같은 동지였는데도 그래도 우리에게도 너의 이름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비밀이었구나.
누가 너를 좌포청의 한갖 다모라 하더냐. 누가 너를 역적의 딸이라 하더냐.
누가 너에게 감당못할 오욕과 고통으로 너를 꺾으려 했더냐.
네 情이 네 가슴을 베기 전에는 너는 우리와 한 상에서 전세를 걱정하고 한 마당에서 수련을 하던 포청의 동지 아니었더냐.
네가 위험에 처할 때마다 그가 흔들렸듯이
그가 또 흔들리면 너는 그를 위해 곧장 죽음과 마주서곤 했지.
대궐의 호위무사들에게 어육이 되어 돌아왔던 밤, 늘어진 네 몸을 안고 굳어버린 그의 얼굴이 생각난다.
네가 사라졌을때 그 차갑고 단단하던 사람이 미친듯이 헤메던 산 속....
그에게 너는.. 다른 이는 생각할 수도 없는 천형의 사랑이었고, 목숨을 걸며 지켜야할 누이였고, 그가 걸어가며 바라보는 먼 불빛, 가장 깊이 박힌 가슴 속의 한자루 칼이었겠지.
네가 그 사람에게 다가갈수 없어서 괴로왔듯이, 너의 외로돌린 고개를 바라봐야 하는 그 사람도 그랬겠지. 그래서 그는 너 외엔 다른 이를 알 수 없었던 것이고, 너는 그 사랑을 밀어내야 했겠지.
이 모진 비바람에 당신 없이 어찌 혼자 살라고 그는 그렇게 갔던 것일까.
그는 그 길을 어찌 갔을까. 네 이름 하나, 불꽃으로 새긴 네 이름 하나 가슴에 품고 어찌 일어서 떠났을까..
장승같은 사내들이 주먹으로 눈물을 씻는 그 바닷가에서도 너는 울지 않았다.
이미 넋이 이 생의 것이 아니었는데 눈물인들 남았겠느냐....
옥아...
그 사람 없는 세상을 너는 살 수 없고, 네가 그토록 찾던 혈육을 그가 먼저 알아버렸으니 그도 네 오라비를 죽일 수 없었고, 정인도 오라비도 남지 않은 이 캄캄한 세상을 너는 어찌 살았겠느냐.
내내 살아 남아 평생 견디라는 그 형벌이 어쩌면 가장 가혹했을 것 아니냐...
옥아...
박꽃같은 작은 별 하나가 포청지붕위까지 내려온다.
어쩌면 처음 포청에 오던 날, 푸른 저고리 동정위로 말갛던 그 얼굴이구나.
종사관이 복직했던 밤, 그의 옆 모습을 보며 행복해하던 그 얼굴이구나...
편안하냐...
그 나라는 모두 편안하냐...
눈물도 이별도 없는 아득한 그 나라의 언덕
네가 있는 나무 아래 꽃은 흐르고 흘러 그에게 닿고
그의 숨결이 더 이상 아픔도 눈물도 아닌 온전한 평화
너를 보고 그가 웃고, 그의 웃음에 네 어깨를 기대는 그 나라...
나는 두 사람의 이름을 지우지 못한다.
너희는 우리들 가장 아픈 이름, 두고두고 못이 되고 한이 될 사람들.
그리고 너는 우리의 그립고 아픈 누이, 불쌍하고 서러운 누이..
내 맘에 맺힌 한송이 박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