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춘이 말하는, 노무현, 유시민, 이해찬- 펌글
시민광장에서 만드는 월간지 형식의 "시소"라는 무가지에서 발췌한 글이라오.
쇟이 손가락 쭈물러가면서 타이핑했소.
저작권을 논하신다면....한번만 봐주십셔 굽신굽신(--)(__)/ 알랍 첨맘님♡
<전략>
○ 이제 좀 가벼운 이야기들을 듣고 싶습니다. 많은 분들이 선생님을 이해찬 前총리님과 유시민 前장관 사이에 계신 어떤 분으로 곧잘 생각하던데, 실제 세 분의 인연이 궁금합니다.
- 이 총리하고 저하고는 30년 친구죠. 깊은 인연의 시작은 8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요. 시민이가 그 때 두 번째로 구속되어 관악경찰서로 면회를 갔을 때였어요. 면회가 안 된다 해서 이총리한테 전화를 했어요 같이 가자고.
경찰서 앞에서 만났는데, 깡마른 몸에 커다란 뿔테 안경 끼고 농구화 신고 있더라고요. 들어서면서부터 경찰서가 들썩거릴 정도로 소리를 지르고 깡패처럼 그러는 거예요. 깜짝 놀랐죠. 그때가 민통련 정책실장 할 때죠.
경찰서에서 아주 악명이 높았어요. 제발 이해찬이 좀 데려오지 말라고.(웃음) 그러면서 많이 친해졌죠.
기억 속에 아주 깊게 남은 장면도 있어요. 85년 10월 초 새벽인데, 마산교도소에서 시민이가 출소하는 날이었어요.
장영달 선배가 자기 이종여동생이 마산에 살고 있다고, 거기서 자고 아침에(그때는 통금 마치는 시간에 출소자를 내보냈어요) 시민이 데리고 올라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녁에 고속버스 운전수 바로 뒷좌석 1,2번에 이총리하고 둘이 같이 앉아 내려가는데, 글쎄 마산 도착할 때까지 내내 떠드는 거예요. 그렇게 수다스런 줄 몰랐죠. 딸 얘기,마누라 얘기, 민통련 어려운 얘기, 처가 얘기...아이고 말도 못해.(모두 웃음)
그 집에서 자고 다음날 새벽에 마산교도소에 갔더니 시민이가 옷 보따리를 들고 나오더라고요. 우리 어머닌 대구에서 오시고. 나, 이해찬, 장영달 이렇게 있는데, 누가 온다며 기다리자는 거에요. 누구냐 했더니, 노무현 변호사가 온다 했다고 그래요. 참 웃기죠? 미래의 참여정부 대통령,총리,장관,의원들이 한자리에 모일 뻔했죠.
그 새벽이 잊히질 않아요. 김영식 신부님하고 노변호사를 기다리는데, 결국 그날 오시지는 못했지만요.
사람들은 이총리를 아주 무섭다고들 하는데, 재밌는 분예요. 6월항쟁 때 징역 잠깐 살고 나오는데, 이총리가 점심 먹으면서 "에이 나처럼 잘 도망다녀야지 잡혀서 그게 뭐야"하고 놀린 적도 있어요. 88년 4.26총선으로 이해찬이 13대 의원이 됐는데, 하루는 이총리 내외가 새벽에 우리집에 왔어요. 유시민이가 내 보좌관으로 일을 좀 해줘야겠다
하더군요. 그때 5공특위,광주특위 잘 했죠. 그래서 스타로 발돋움한 거고요. 무슨 일 있을때 마다 나를 새벽에 그렇게 찾아왔어요. 재작년 대선 경선에 참여할 때도 아침에 전화를 해서, 저보고 캠프에 들어와 줘야겠다고 하길래 알았다고 했죠.
긴 설명이 필요 없이 눈빛만 봐도 아는 그런 사이죠. 탁월한 능력을 신뢰해요. 둘(이총리와 유시민)이 보완적인 측면이 있어요. 둘이 함께 가면 어떤 시너지가 있으리라는 확신에는 변함이 없고요. 재밌는게, 이총리 부인이 별명이 쫀쪼니아인데(부잣집 딸인데도 정치인 마누라하다 보면 그렇게 되겠죠) 지출이나 씀씀이가 아주 깐깐 하고 그래요. 그런데 유시민한테만은 좀 너그럽더라고요. 한 가족처럼 지내는 그런 게 있어요. 다른 사람들도 어려운 얘기 건넬 게 있으면 저한테 와서 이총리한테 말 전해달라 그래요. 이총리가 성질부리고 그럴 때 내가 뒤에 가서 막 잡아 흔들고요.(웃음) 이총리가 나보다 한살 아래지만 친구처럼 지내요. 자기가 인격적으론 선배라고 아직도 우기지만요.(일동 웃음)
○ 2001년 10월부터 2004년 3월말까지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이사를 지내셨죠? 차관급 공직이고, 또 선거 때 하마평에 자주 오르내리시고요. 사실상 정치인인 셈 아닌가요?
- 직책은 없지만 준정치인이라 해도 할 말 없죠. 하지만 작가들이 그래서 문젠데, 언제라도 글을 쓰면 되니까 꾼들 처럼 정치에 올인하지는 않아요. 제가 무슨 일을 꼭 해야만 한다면 마다하지는 않겠지만. 지금까지 인풋을 많이 했기 때문에 아웃풋이 나와야 될 때도 됐고, 어디 인터넷도 안 되는 곳에 틀어박혀 워드만 되는 노트북 가지고 소설을 쓰고 싶기도 해요. 하지만 범국민적인 어떤 움직임이 있다면 몸을 뺄 생각은 없어요. 그럴 전망이 쉽게 보이지는 않으니까 공익적인 글쓰기는 이쯤에서 그만하고, 유시춘이 이름 걸고 제대로 하나 쓰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 하나밖에 없는 동생 보면서 애틋한 맘도 들고 하실 텐데, 요즘 저렇게 지내는 거 보시면서 맘이 어떠세요?
- 정치낭인 돼가지고 유리걸식 하면 안스럽고 그렇겠지만, 글 쓰고 책 읽고 하는 거 좋아하고 제일 잘하는 일이잖아요.
불우한 시대를 만나 정치하고 그런 거지, 저게 전업이었을 텐데요 뭐. 내가 볼 때 구정치하고는 참 안맞는 멘탈리티와 마인드를 가지고 있어요. 정치라는 게 식사하고, 술 마시고 사람 만나는 건데, 그 셋 다 너무 싫어하거든요.
혼자 책 읽거나 글 쓰는 그런 거만 좋아하고요. 지금 뭐 가슴 아프고 그렇지는 않아요.
누나라서가 아니고 3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볼 때, 우리 정치가 좀 변해야 한다는 생각은 있어요. 우리 정치도 좀 지적이고 지식기반 사회에 걸맞은 정치인이 태어나야 하는데, 구정치를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으면서도 새로운 정치를 태동시킬 리더. 스타가 있어야죠. 유시민이 어렵사리 여기까지 잘 헤쳐 왔는데, 이걸 그냥 사장시키는 것도 아깝긴 하고요. 개인적인 유산으로만 하기에는 사회적으로 좀 아깝죠, 괜찮은 자산인데.
시민사회에서 나와 어떤 인물이 저 정도의 성취를 또 하겠습니까. 제로베이스로 가져가기에는 아쉬움이 좀 있어요.
가족으로 보자면 지금처럼 지내는 것도 괜찮죠. 돈도 그게 나아요. 까먹는 거 없고, 남한테 손 안 벌려도 되고, 암튼 불행해보이지는 않아요.
<중략>
이제부터의 이야기는 노대통령님 서거 뒤 6월 말에 따로 만나 나눈 것들입니다.
○ 노대통령님을 어떻게 만나셨나요?
- 87년 6월항쟁 때 구속되었다 7월 중순경 풀려났어요. 7,8월 노동자투쟁이 한창이었는데, 당시 마산-창원 지역이 중심이었죠. 대우조선 이석규 열사 장례를 둘러싸고 당시 부산 국본 집행위원장이었던 노무현 변호사가 제3자 개입금지 위반으로 마산셩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었어요. 국본의 민권위원장을 이상수 前노동부장관이 맡고 있었고
제가 부위원장을 맡고 있어서 마산까지 내려가 노변호사를 만났습니다. 더벅머리 촌놈 같았어요. 모심다가 나온 못생긴 농부 같았고요. 변호사는 기득권층 사람인데 도저히 그렇게 보이지 않는 거에요. 다듬어지지 않은 보석처럼 거칠게 반짝이는, 아주 강한 인상이었어요. 저를 보더니 소년처럼 씨익 웃으시더라고요. 노대통령님과 첫 만남 인데 잊히질 않아요.
○ 정치적으로는 어떻게 만나셨는지요?
- 처음하는 얘긴데, 2001년 9월 말쯤일 겁니다. 민주당 경선 움직임이 시작되기 직전이었어요. 이인제씨가 대세를 타고 있었던 때죠. 유시민은 칼럼 쓰고 <100분 토론> 진행하고 있을 때였고요. 제가 유시민과 상의를 했어요.
이인제를 이기려면 이대로는 안 되니까, 내가 노무현 최고위원과 자리를 마련할 테니 같이 보자고 했어요. 그래서 여의도의 한 일식집에서 저녁에 만났어요. 노대통령님, 염동연 특보(전 열린우리당 사무총장), 나와 유시민. 이렇게 넷이서 식사를 하며 얘기를 나눴죠. 도와드릴 테니 경선에 꼭 나서시라고 제가 말씀 드렸어요. 처음에 좀 놀라시더니 가만히 듣고 계시더라고요. 저는 그때 김근태 라인의 국민정치연구회 정책실장을 맡고 있었어요. 당신들 같은 주류 운동권 출신들은 김근태 사람들 아니냐, 그런데 왜 나를 도와주려 하느냐며 의아해하시더군요. 되겠느냐고 물으시길래 도와드리겠다고 답을 했어요. 날 도와주는 이유가 뭐냐고 물으시더군요. 두 가지를 댔습니다. 이인제씨로는 안 된다는게 첫째 이유였고, 정권교체 실패 시에는 또다시 87년 분위기가 올 것 같은데 이민을 가면 갔지 그렇게는 못살겠다고 말씀드렸어요. 개혁 후보끼리 단일화가 이뤄져야 한다고도 말씀 드렸고요.
두 시간 정도 얘기를 나눴는데, 유시민도 얘길 했어요. 경선엔 당원과 일반국민이 50대 50으로 참여하니 충분히 바람을 일으킬 수 있다. 이렇게 유시민이 이야기하더군요.
이야기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 헤어질 때, 악수를 나눈 뒤 정면에서 제 두 어깨를 잡고 환히 웃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너무 걱정 마세요. 두 분은 줄 잘 서신 겁니다." 그리고 며칠 안 있어 저는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임명됬고,유시민은 노무현 후보와 함께 했죠. 이제서 하는 말인데, 노대통령님께서 약속을 안 지키셨죠. 저는 줄 잘 섰는데자리도 하나 안 주시고(웃음).
○ 노무현 대통령님과 참여정부의 정신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그것이 6월항쟁의 정신과 어떻게 연관돼 있습니까?
- 우리 사회 해방 이후 60년간 누적돼온 기득권층, 특히 정치적 수구세력과 조중동 같은 기득권층간의 카르텔에 맞서 돌멩이 세 개로 골리앗을 쓰러뜨리듯 싸워온 분이 노대통령이시죠. 다만 짧은 승리 후에 그것을 지속시키고 그분의 가치를 현실에서 구현해낼 정치세력의 형셩에 실패했기 때문에 그렇게 쓰러지신 겁니다.
6월항쟁의 정신이란 다른 게 없습니다. 그것은 곧 헌법 제1조의 정신이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 바로 그것이에요. 바로 참여정부가 계승하고 자처한 정신입니다. "국민이 대통령입니다"
하는 참여정부의 선언적 구호가 바로 거기에서 나온 것이죠. 노무현의 정신이 곧 참여정부의 정신이고, 그것은 6월항쟁의 정신과 그렇게 맞닿아 있습니다.
5월 광주와, 그리고 5월 봉하마을과 6월항쟁이 이제 모두 지났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역사로만 기억하고 말하면 안된다고 유시춘은 말합니다. 마시는 물처럼, 밤마다 챙기는 베개처럼 늘 함께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노대통령님이 돌아가시기 한 달 전 올린 글에서(4월 24일 <서프라이즈>, 나는노무현이로소이다) 유시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 제가 보는 그는 이해타산에 밝거나 능수능란함과는 거리가 먼 허술한 이상주의자입니다. 그런 그가 한 시대를 끌고나갈 수 있었던 힘은 바로 그가 지향하는 가치가 21세기 한국이 요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라 봅니다."
"노무현은 우리를 보고 이제 자신을 버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어쩔 수 없이 되뇝니다. 나는 노무현이로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