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눈물 2011. 11. 3. 21:55

 


오늘날의 미인과 많이 다른 줄은 알겠으나 어딘지 모르게 화려하고 빛나는 미모보다는 조촐하고 그윽한 아름다움이 보이는 여인이다
틀어올린 가체가 더 무겁게 느껴짐은 좁은 어깨폭과 저고리 소매탓만은 아닌 듯하다.
규중의 처자보다는 기방의 여인으로 먼저 느껴지는게 혜원의 그림습성을 짐작함이어선가.
단순한 색상의 고졸한 치마저고리 밑으로 살짝 내민 외씨보선이나 진동선과 동정 아래의 물린 색깔이 그윽하게 다가오니, 정녕 아름다움은 마음으로 먼저 물들이는 것이지 눈으로만 다가오는것은 아닌듯하다.

하루종일 비는 오시고..뒤적거리는 책에 마침 기생과 비 이야기가 있어 옮긴다.
지면글과 화면글의 차이상 줄바꿈과 문단은 보기 편하게 내 마음대로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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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다

중세어로 교합하다, 성교하다, 결혼하다의 뜻이다. 아마 고대어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것이 물이 굳어져 고체가 되다라는 뜻의 얼다와 어원이 같은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그 두 가지 의미 사이에는 또렷한 상관성이 있어보인다.

조선조 중엽 때 사람 임제가 기생 寒雨와 주고받은 시조는 얼다의 이 중의성을 이용해 재치를 한껏 뿜어내고 있다. 임제가 평양길에 기생 한우를 만나 그녀와의 술자리에서 노래한다.

北天이 맑다커늘 우장없이 길을 나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로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



찬비는 임제가 실제로 맞았을지도 모를 차가운 비이기도 하지만, 기생 한우의 이름이기도 하다.
찬비를 맞았으니 얼어 자겠다는 것은 춥게 자겠다는 뜻도 되지만 한편으로는 찬비와 즉 한우와 잠자리를 같이 하겠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한우가 이에 화답한다.


어이 얼어 자리 무삼 일 얼어 자리
원앙침 비취금을 어디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녹아 잘까 하노라

역시 동사 얼다와 자기 이름 찬비(寒雨)의 중의성을 이용한 재담시다.
얼다와 찬비의 중의성 때문에, 자신이 임제와 잠자리를 함께하겠다는 것인지가 모호하다.
얼어 잔다는 것이 이 맥락에서 산반된 뜻 두 가지를 지닌 만큼, 얼어 잔다의 대응어로 쓰인 녹아잔다는 것도 그에 따라 상반된 뜻 두가지를 지닌다.
그날 밤 두 사람이 잠자리를 함께 했는지의 여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고종석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중


맨 마지막의 재담은 고종석의 것으로 하고 ^^;;
하루종일 창문을 긋고가는 빗줄기를 보면서 책을 뒤적이다보니
문득 사랑이나 만남도 이처럼 고아하고 재치있게 주고받던 옛사람의 풍류가 그리워진다
하기야. 이런 만남이 그녀가 재치있는 기생이었고, 이런 말로 주고받을 풍류선비였기 망정이지 내밀한 규방의 여인네와 반가의 도령들이 주고받을 인사는 아니었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