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그녀는 다모폐인
나으리, 이놈 원해입니다
소금눈물
2011. 11. 13. 22:13
입동을 지난 지도 벌써 사흘이 지났습니다.
매운바람이 하루 종일 수련장을 쓸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 신입 비호대 몇 놈이 들어왔습니다. 좀 칼깨나 쓰고 포승줄을 다를 줄 아는 몇 놈들 우포청으로 보내고 나니, 영 허릅숭이만 남은 것 같습니다.
나으리. 나으리께서 만드신 비호대 입니다. 열 명 남짓한 비호대 만드는 것도 겨우 어지를 받고서야 되는 일인데, 꼭 막히신 나으리께서 무슨 구실로 서너 오나 되는 군대를 만드셨는지 저는 지금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놈들 키우실 때, 그리 고생하시더니 결국 우리가 해내었지 않습니까. 뭐 아직 항마지검세 첫 초식 하나 제대로 떼는 놈들 없긴 하지만 그래도 딴엔 자부가 대단합니다. 달포마다 한번씩 군영에서 군대를 보내 또 가르치기도 하지요.
바람이 쉬이 잦아들 것 같지 않습니다. 포청 마당을 휩쓸고 가는 저 바람.... 나으리께는 닿지 않겠지요. 거기는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 일은 없겠지요....
....
제가 못난 탓이었습니다. 머리통에 든 것도 없이, 미련하게 몸뚱이 하나로 구르는 놈이 무얼 알았겠습니까. 제가....산채에 잠입했을 때, 조금만 더 눈치가 빨랐더라면, 조금만 더 좌포장께 빨리 달려갔더라면 일이 이리되지는 않았을 것이었습니다.... 옥이년이 놈들과 마을로 내려가는 것을 두 눈 뜨고 보면서도 속수무책으로 발만 구른 이놈의 미련함이었습니다.
난을 진압했던 그 밤, 놈들의 숙영지로 달려가는 건, 옥이년이 아닌 제가 할 일이었습니다. 이 놈, 머리에 든 게 없어 축지놈과 흰소리를 하느라 제 본분을 잊었습니다.
일개 다모인 옥이년이 뛰어갔는데, 나으리의 비호대인 이 놈이 아무 생각 없이, 그 밤을 그리 보냈습니다.
이 놈이 죽었어야 했습니다. ....쓸 데도 없는 이 놈....마누라도 자식새끼도 없는 이 놈이 ... 이 놈이 죽었어야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모두..참 아득한 일이지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모두 화적떼에게 잃고, 늙은 어미와 거렁뱅이처럼 저잣거리를 헤맬 때, 이 놈을 보시고 사람으로 거둬주신 게 좌포장이셨습니다. 하느니 싸움질이요, 들은 게 성질밖에 없던, 이 놈을 처음으로 쥐어박아가며 사람취급 해준 게 주완 형님이셨습니다.
나으리께서 처음 좌포청에 오셨을 때, 솔직히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다 화끈거립니다. 계집애 같은 얼굴로 조곤조곤 부임인사를 하는 저 이가 작대기나 한 번 쥐어봤나 했다니까요. 하하. 그러니 제가 뭐라 합니까. 머리야 상투매려고 달고 다니는 놈 아니랍니까. 첫 대련서 그처럼 혼구멍이 나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지요.
축생처럼 밥이나 먹고 잠만 처자고 술타령이나 할 줄 알던 저 같은 놈도, 세상에 대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해 준 분이었습니다. 행세깨나 하는 이들이나 하는 소리로 나라니 백성이니 떠드는 거지, 이 놈이 받은 게 뭐가 있다고 그따위 소릴 지껄이나...솔직히 그런 심정이었습니다.
이 놈을 받아준 영감만 아니셨다면, 처음으로 정을 준 주완형님만 아니었다면..그리고 나으리만 아니었다면.....젠장 충성이고 의리고 하는 따위가 이 놈하고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주완형님, 나으리, 저....같이 살고 싶었고 같이 죽고 싶었습니다. 사내로 태어나 이만한 이들을 얻었으면 된 거다 그리 생각했습니다.
.....저는...그리 될 줄 알았습니다. 같이 죽을 줄 알았습니다. 아니, 나으리의 앞 서 이 놈 먼저 거꾸러지지, 이리 될 줄 정말 몰랐습니다....
저는 사람의 도리나 정 같은 거 모르는 놈입니다. 계집애처럼 그런 소리 나불대는 놈들. 참 한심합니다......한심...합니다...
여긴 뭐..별 일 없습니다.
영감께서 말씀이 없어지시고 출입도 뜸해지긴 하셨지만 가끔 궐에 들어가시는 날은, 밤이 늦습니다. 두 분이 무슨 말씀을 그리 오래 하시는지....
다들 여전하지요. 아 참, 주완 형님 둘째 보신 거 아시지요? 제가 보기엔 형님을 꼭 닮은 게 앞날이 걱정되긴 하지만 형님은 펼쩍 뜁니다. 아 옥이년을 닮았다나요? 하하~!! 아니, 형님 딸이 어째 그 년을 닮습니까? 형수님은 질색을 하지만 형님은 막무가내로 우깁니다. 나으리 보시기엔 어떠십니까? 이 놈은 아무리 봐도 모르겠습니다. 하하~
축지놈도 차츰 나아집니다. 벌써 일년 반이 지나가니 견딜 만 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 놈, 성질, 아직도 더럽긴 하지만, 제 방망잇자리 하나는 확실하게 해 먹고 있습니다.
요즘 좌포청에서 제일 목소리 큰 게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안녹사영감입니다. 아침저녁으로 병택이놈과 고함을 질러대는 통에 아주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 놈도 빨리 장가를 가든지 해야 여기가 조용해질텐데 아주 심란해 죽겠습니다.
나으리...
이 놈...나으리께 받은 거, 하나도 없습니다. 말씀이야 비호대 밖에 믿는 거 없다고 그러셨지만, 아~ 형님처럼 따귀 한 번 때리신 적도 없고 그 많던 목검, 쓰다버리는 것 하나 제게 주신 거 없으십니다.
서운합니다~! 저, 언제 가서 나으리께 꼭 따질랍니다!
한수에 얼음이 들면...저 혼자 낚시를 가렵니다. 주완형님은 아무래도 딸년 재롱에 정신이 없을 듯 합니다.
나으리. 제게 헛소리 하신 것 아시지요? 지금도 가끔씩 낚싯대를 꺼내 들여다보면서 저 욕 많이 합니다.
지키지도 못할 약속, 사내새끼가 그런 헛소리나 하고 다니니 그렇게 됐지~! 저 욕 많이 했습니다.
아무래도 저녁부턴 눈발이 비칠 것 같습니다.
이 놈들 말굽이나 갈아놨나 가 봐야겠습니다. 가만히 두면 그 놈들,아무 생각 없는 게 꼭 저 꼴이지 않습니까.
......
걱정마십시오! 나으리 한 분 없다고 좌포청이 어디 가겠습니까! 그저 나으리는 발 뻗고 푹 주무시기나 하십시오. 거기서 토포다닐 일이야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뭐..
.....
이제는.... 그리....마음 안 쓰셔도 되지 않습니까....이젠....옆에서 내내 같이 있을텐데요...
.....
저 나갔다 와야겠습니다. 하~! 어찌 이리 바람이 불어대는지 좌포청 마당이 온통 뿌옇습니다.
젠장...
......아무리 잘 나면 뭐해.......죽으면 다 끝이지.....다 끝이지....뭘....
....누가...그리... 가래나....누가......
.....
......젠장....